그를 처음 만난 곳은 북한강이었다. 붉은 햇살이 밤새 언 강의 등허리에 따스운 입김을 후후 불어대는 아침. 이곳으로 나를 이끈 것은 호사비오리였다. 그의 예민한 성깔은 새벽 댓바람부터 나를 조바심치게 했다. 멀리 반짝이는 윤슬에 실루엣으로 떠있는 것이 자갈인지, 새인지 긴가민가 바라보는 순간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호사비오리. 새들이 흩어진 뒤 홀로 남은 강은 쓸쓸했다. 그 쓸쓸함은 어디엔가 숨죽이고 있다 겨울이 되면 불쑥 살아나 나를 팔당으로, 충주 남한강으로, 나주 드들강으로 몰고 다니며 찬바람에 떨게 했다.
오리과의 비오리 가운데 호사비오리는 단연 눈길을 끈다. 긴 댕기깃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힘없는 것들은 생존의 절박한 상황이 돼서야 비로소 주목을 받곤 한다. 어디든 동행할 정도로 금슬이 좋다는 호사비오리가 왜 더 많은 종족을 퍼뜨리지 못하고 지구상에 3600~6800마리만이 생존하는 희귀조가 됐을까? 정다운 이들이 살아남기 힘든 곳이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대체 어떤 곳일까?
자맥질을 마치고 수면 위로 떠오른 호사비오리의 부리에 물고기 한 마리가 빛나고 있다. 수면을 박차며 날아오를 수 있는 것도, 차가운 강바람에 따스한 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직은 강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백두산 기슭의 맑은 계곡이거나 북녘의 아무르강, 우수리강. 그들은 지난겨울 여행을 어떻게 기억할까? 우리는 지난 한 해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 해의 끝자락, 지치고 낡은 우리의 기억들은 모두 저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내자. 강물이 꽁꽁 얼어붙어 긴 침묵에 들기 전에.
안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