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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42] 암컷은 설치지 마라?

조선일보 2023. 11. 29. 03:01 그녀가 스노볼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반란 이후에도 설탕이 있을까요?”였다. 몰리의 질문에 스노볼은 “아뇨”라고 대답했다. “이 농장에선 설탕을 만들 방법이 없소. 게다가 당신한테 꼭 설탕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소?” 몰리가 또 물었다. “그때 가서도 내가 갈기에 리본을 매고 다닐 수 있을까요?” ”동무,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리본이 바로 노예의 표시요. 리본보다 자유가 더 값지다는 걸 모른단 말이오?” 몰리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내심 아주 완전히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다. -조지 오웰 ‘동물농장’ 중에서 특정 여성을 ‘암컷’이라 조롱한 야당 전 의원이 일시 당원 자격 정지라는 가벼운 징계를 받았다. 당대표는 ‘행동과 말을 철저하게 관리’하라고 의원들에게 당부했..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40] 경찰관에 대한 포상

조선일보 2023. 11. 15. 03:02 “자넨 10분 전에 체포된 거야, 밥. 시카고 경찰은 당신이 뉴욕에 올지도 모른다고 했어.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하더군. 순순히 함께 가는 게 좋을 거야. 자네에게 전해 줄 게 있네. 여기 창가에서 읽어 봐. 웰스라는 경찰관이 준 거야.” 서부에서 온 남자는 작은 종이를 폈다. 읽던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밥, 나는 제시간에 그곳에 갔었네. 그리고 시카고에서 찾는 지명 수배범의 얼굴을 보았지. 내가 직접 자넬 체포하고 싶진 않았어. 그래서 다른 형사를 보낸 거라네. 지미가. -오 헨리 ‘20년 후’ 중에서 도주한 특수강도 피의자를 체포한 경찰관들이 1계급씩 승진했다. 특진은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범인을 쫓아 찻길을 달린 형사들의 몫이 아니었다. 범인의..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9] 혁신의 아이디 ‘광주’, 패스워드 ‘5·18′

조선일보 2023. 11. 8. 03:02 자신들의 시대에는 해독의 어떤 약속이나 지침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제각기 녹이 슬어 삐걱대기만 할 뿐 열리지 않는 자물쇠가 되어버린 사람들 모두가 자물쇠에 맞는 열쇠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패스워드가 있어서 집단에 편입될 수 있으며, 희생양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결속된 구성원들 간의 은밀한 희열과 더불어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제물이 마련된다. 피스톤이 있어서 단두대와 분묘에 불과한 사회의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 중에서 ‘희생, 통합, 변화,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는 여당 혁신위원장의 첫 공식 외부 일정은 광주 5·18 묘지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광주가 대한민국의 민주..

[이후남의 영화몽상] 아내가 떠난 빈자리, 슬픔을 견디는 카메라

중앙일보 2023. 11. 7. 00:25 16세기 조선에 살았던 ‘원이엄마’라는 이가 있다. 그가 후세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98년 경북 안동의 옛 무덤에서 발굴된 편지 덕분이다. 무덤의 주인이자 젊은 나이에 세상 떠난 남편을 향해 절절한 마음을 한글로 쓴 편지다. 우리네 전통 장례에서 곡(哭)을 했듯 문화권에 따라서는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17세기 무굴제국의 황제처럼 부인의 죽음 이후 거대한 궁전 같은 무덤 타지마할을 만든 이도 있다. 때로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지난주 개봉한 다큐멘터리 ‘약속’은 때 이르게 엄마이자 아내를 떠나보낸 어린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은 언제부터인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아들에게 시가 있다면, 아버지에게는 영화가 있다......

꽃이 들려주는 생명과 죽음의 이야기, 김예랑 사진전 '멈춰진 춤'

한국경제 2023. 11. 6. 17:11 수정 2023. 11. 6. 17:13 사진가 김예랑의 개인전 '멈춰진 춤'이 7일 서울 연남동 화인페이퍼갤러리에서 개막한다. 꽃을 소재로 작업을 이어온 김예랑이 대형 카메라와 4x5인치 필름으로 촬영한 뒤, 19세기 인화 방식인 검프린트로 인화한 작품 21점을 19일까지 선보인다. 스튜디오에서 여러 종류의 꽃을 다양한 화병에 꽃아 촬영한 '멈춰진 춤' 연작 각각의 장면엔 저마다 다른 동작과 표정을 짓는 의인화된 꽃들이 등장한다. 한 생명체의 가장 화려한 절정을 상징하는 꽃을 담은 사진이지만, 화사하지만은 않다. 어린 꽃봉오리, 만개한 꽃송이 그리고 시든 꽃잎들이 뒤섞여 갖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인생의 단면들을 차례로 감상하는 느낌이..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8] 재판 불출석과 법정의 권위

조선일보 2023. 11. 1. 03:03 “분명 이길 수 있죠?” “이오리, 걱정하지 말거라. 지더라도 깨끗이 지고 싶다고 바랄 뿐이다.” “스승님. 이길 수 없으실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먼 나라로 빨리 떠나면….” “세상 사람들의 말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네가 말하는 대로 어리석은 약속이기는 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도망친다면 무사도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무사도를 저버리는 것은 나 혼자만의 수치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까지 저버리는 것이 된다.” -요시카와 에이지 ‘미야모토 무사시’ 중에서 단식투쟁을 시작으로 벌써 네 번째 결석이다. 부득이 재판에 참석하지 못할 수 있다. 2022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불출석 의견서를 내고 바이든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났다. 그러..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7] 역사의 복원

조선일보 2023. 10. 25. 03:06 어쩌면 나는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아니면 전과 똑같은 역설이거나. 즉, 바로 우리 코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교통 혼잡을 초래했던 오랜 공사를 끝내고 광화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 백성과 소통하던 월대를 복원했다고 한다. 중국 사대의 표상이라며 세종대왕이 반대했던 경복궁 월대는 1866년..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6] 100점으로 위조한 31점 낙제생

조선일보 2023. 10. 18. 03:03 낙제 카드를 받았을 때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숨겨진 위조 재능을 발견해 낸다. 토드가 2학기와 3학기 성적표에 잉크 지우개를 사용하여 부모에게 보이기 전에 성적을 고치고 사인을 받아 학교에 제출할 때는 원래대로 고쳤을 가능성도 있다. 잉크 지우개를 두 번 사용한 흔적은 잘 보면 눈에 띄게 마련이지만 담당 교사는 평균 60명의 학생을 담당하고 있다. 반환된 성적표의 고친 흔적을 조사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스티븐 킹 ‘타락의 여름, 우등생’ 중에서 개인이 쇼핑 사이트에 가입할 때도 연속되는 숫자는 위험 경고를 하고 알파벳과 특수 문자를 섞어 만들도록 한다. 그런데 국정원이 선거관리위원회를 가상 해킹한 결과, 인터넷망에 들어가는 비밀번호가 ‘12345′,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