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作品속 LIFE 444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5] 세련된 거짓, 촌스러운 진실

조선일보 2023. 10. 11. 03:04 런던에 새로운 은행을 설립하겠다며 영국재정청에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신청인은 국내 및 해외 금융기관들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인상적인 국내의 저명한 이름들을 줄지어 세웠더군요. 정무차관 오브리 롱리그와 우리의 예비 장관께서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원에서 늘 밑바닥을 훑으며 살아가는 친구들도 합류했습니다. 법률 고문으로는 유명한 팝햄 박사가 있습니다. 드살리스 전 해군 대령은 홍보 공세의 선봉에 나섰습니다. -존 르 카레 ‘우리들의 반역자’ 중에서 아시안게임 축구 한·중전 당시, 국내 포털 사이트의 중국 응원 클릭 수가 2300만건이 넘었다. 평소엔 관심 없어도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자국팀을 응원하는 건 인지상정이다......평소 여론도 ‘드루킹’처럼..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4] 판결에 영향 미치는 판사의 성향

조선일보 2023. 10. 4. 03:02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금 내리신 판결의 근거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몰토가 물었다. 한번 붙어 보겠다는 듯 판사석을 올려다보고 있다. 서로 증오하고 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원한을 파헤치자면 고고학적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원한의 일부는 캐롤린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몰토는 원시인같이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북부 지원에 있을 때도 리틀 판사가 캐롤린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을 알았을까? -스콧 터로 ‘무죄 추정’ 중에서 영장 전담 부장판사는 ‘위증 교사 혐의는 소명되는 것으로 보인다. 관여가 있었다는 상당한 의심, 부적절한 개입을 의심할 만한 정황들’이 있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하지만 현직 대표라는 점을 ..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3] 정치적 우상에 열광하는 사람들

조선일보 2023. 9. 27. 03:01 “당신더러 츠랑 집에 갔다 오라고 한 건.” 그가 말했다. “당신을 그, 페슈라는 자에게서 멀리 떼어놓으려고 그랬던 거야. 그 작자가 돌아갈 때 당신에게 인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왜 이 섬에 온 건지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은 게 분명하군. 그는 자기가 어떤 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고 잔뜩 겁을 먹고 있었어. 그리고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지. 원주민에게서 옮은 거야. 그 섬에서는 흔한 병이니까. 그런데 엘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로맹 가리 ‘폭풍우’ 중에서 고려대 입학과 의사 면허가 취소된 조민의 에세이가 출간 즉시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그녀의 아버지 조국도 ‘나는 정의, 세상은 불의’라고 주장한 책을 출간, 한 달도 되지 않아 ..

[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86>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속물 변호사가 악마 같은 의뢰인을 만났을 때

이코노미조선 2023. 9. 25. 18:05 모든 범죄자는 악(惡)이다, 검사는 생각한다. 대다수의 범죄자는 약한 인간일 뿐이다. 변호사 마이클 할러(이하 미키)는 생각한다. 그는 링컨 차를 타고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길 위의 변호사다. 근사한 사무실에서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서류를 뒤적일 시간이 없다. 그의 고객이 마약, 매춘, 폭행을 일삼는 뒷골목 잡범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발가벗겨지기 전까지만 고상하다. 법치국가에서는 체포되기 전까지만 선량하다. 법, 그 자신이 ‘거대한 괴물’일지 모른다. 그래도 법은 인간쓰레기조차 변호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증거에 따라 피의자를 범인이라 확신하는 것이 검찰의 역할이듯, 의뢰인이 무죄라 믿고 변론하는 것이 변호사의 의무다. 단, 선입금 후변호, 입금하지 않으면..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31] 한국 반도체의 아버지, 강기동 박사

조선일보 2023. 9. 13. 03:04 공사가 정지된 건설 현장엔 사람 그림자도 없이 계절풍만 불고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높이 80미터의 고로와 수리 중인 열풍로, 전로, 주상 건물, 원료를 나르는 벨트 컨베이어 같은 거대한 최신 설비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뎃페이는 고로 건설 현장이 한눈에 보이는 안벽에 올라 철강인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걸어온 설비들을 홀린 듯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지력, 체력, 정신력을 모두 쏟아 넣은 것을 가동 한 발짝 앞에서 빼앗겨 버린 것이다. -야마사키 도요코 ‘화려한 일족’ 중에서 2008년 10월 29일 ‘제1회 반도체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반도체 공헌자들에게 정부 포상과 공로패를 주었다. 그날 특별 공로상을 받은 김충기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강기동 박사가 이..

[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85> 캐스트 어웨이] 인생의 파도는 내일 또 무엇을 실어다 줄까

이코노미조선 2023. 9. 4. 18:03 배가 난파됐다. 모두가 가라앉고 당신 혼자 살아남았다. 마침 수영해서 닿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 무인도가 보인다. 찢어진 구명보트 위엔 빵 한 덩이, 연인의 사진이 끼워진 시계, 담요 한 장, 물 한 병 그리고 배구공이 있다. 헤엄을 쳐야 하니 꼭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까.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고 다시 출장길에 오르는 척에게 켈리는 그녀의 사진을 넣은 오래된 회중시계를 선물한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조금 더 느긋한 시간 속에서 켈리를 생각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계를 받아 주머니에 넣은 척은 금방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비행기에 오른다. 내일도 태양은 떠오르겠지만, 내일도 일출을 보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

[오늘과 내일/이철희]원폭과 봉쇄, 두 아이콘의 좌절

동아일보 2023. 8. 30. 23:45 과학·지성 날개 꺾은 흑백의 정치 영화 ‘오펜하이머’의 무거운 질문 “제길, 하필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한단 말입니다.(Damn it, I happen to love this country.)”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 개발의 주역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과거 좌익 활동 전력 때문에 비공개 청문회에 불려가 자신의 삶 전부가 발가벗겨진 오펜하이머에게 아인슈타인이 “자네는 자넬 사랑하지 않는 여인(미국 정부)을 쫓고 있네”라며 이제 미련을 버리라고 충고하자 한 말이다. 사실 이 장면은 외교관 출신으로 동갑내기 친구였던 조지 케넌이 훗날 오펜하이머 추도식에서 회고한 둘의 대화 내용을 아인슈타인의 당시..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29] 무 한 조각 썰고 칼을 칼집에 넣는다면

조선일보 2023. 8. 30. 03:04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 수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여.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점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추락은 편한 점도 있으니까. 그건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그걸 감추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후 평생 그 이자를 갚느라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 같지. 나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광주 MBC가 주관해 온 ‘정율성 동요 경연 대회’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던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9년간 열렸다. 학교장 추천으로 참석한 어린이 합창단은 자유곡과 함께 정율성 작곡 동요 한 곡을 의무적으로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