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 5242

[사진의 기억] 소달구지와 아이들

중앙SUNDAY  2024. 5. 4. 00:06 아이들을 가득 태운 소달구지가 보리밭 옆을 지나고 있다. 꼬박 걸어서 집에 가야 할 판인데 옆집 아저씨의 소달구지를 만났으니 운수대통한 날이다. 울퉁불퉁한 길이라 달구지가 삐거덕거리고 덜컹대도 횡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종종 길에서 소달구지를 만나면 아이들에겐 행운이지만 그러지 않아도 짐이 무거운 소에게는 피하고 싶은 불운이 아닐 수 없다. 자동차가 드물던 시절, 설사 자동차가 있다고 해도 자동차도로가 없으니 무용지물이던 그 시절 시골길에는 소달구지가 요긴한 이동 수단이었다. 산자락을 몇 개쯤 돌아야 마을에 도착하려나. 오른쪽에 외딴 초가집 두 채는 아직 더 깊이 들어가야 동네가 나올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보리밭에선 보리가 파랗게 물결치고 길가의 나..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마음을 정화시킨 화엄사의 종소리

한국일보  2024. 4. 29. 04:32 만물은 어둠 속에 빠져있고 날이 밝기는 요원한 이른 새벽. 조용한 산사에 갑자기 천둥 같은 우렁찬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화엄사(전남 구례군)가 깨어나는 순간이다.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서 유래한 천년고찰답게 새벽에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가리키는 불전사물의 소리에서 시작하고, 해 질 녘 또 한 번 소리로 하루를 마감한다. 삼라만상의 어둠을 걷어내고 천하의 만물을 깨우는 의식인 동시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이다. 제일 먼저 울린 법고는 땅 위에 사는 중생을, 목어는 물속에 사는 중생을, 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마지막을 장식한 범종은 천상과 지옥에 있는 중생을 일깨우기 위해 울린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대..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9] 인도의 약진

조선일보  2024. 4. 29. 00:01 A.R. Rahman (2008) 인도의 뭄바이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2008년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듬해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트로피 8개를 휩쓸었다. 이 영화는 95년 아카데미 역사상 남녀 주조연상 부문에 단 한 명도 후보를 올리지 못했으나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여섯 번째 영화다. 인도는 ‘발리우드’라고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국 영화 시장을 가진 나라지만 인도 영화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해외시장에서의 영향력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또한 원작 소설은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의 것이지만 연출은 영국인 감독 대니 보일이 맡은 영국 제작 영화다. 팝 음악사에서 인도가 등장하는 순간은 사..

[C컷] 1960년대 서울 풍경

조선일보  2024. 4. 27. 07:00 원로사진가 황규태 사진전 황규태(86)는 촬영한 필름을 태우거나 프린트한 사진의 일부만 확대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사진가다. 사진의 일부만 따와 합성해서 새로운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포토샵이나 AI로 사진보정도 되는 오늘날엔 아무것도 아니지만 1960년대부터 이런 작업을 해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외국 사진 잡지들을 보면서 사진을 공부하던 시절 황규태는 잡지에서 우연히 본 제리 율스만(Jerry Uelsmann)의 초현실적인 사진에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합성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에 그는 태양이나 고층 빌딩을 촬영한 필름을 태워 인화하거나 다른 사진에서 일부만 따와 새로운 이미지를 조합해서 몽타주 형식의 사진을 만들어 낸다. 남들이 뭐라 ..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8] 작고 작은 이 세상

조선일보 2024. 4. 22. 03:03 ‘It’s a Small World’(1964) 지구상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노래는 어떤 것일까? 장르를 불문하고 본다면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Stille Nacht, Heillige Nacht’일 것이다.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번역된 이 노래는 오스트리아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단 감독인 프란츠 자비어 그루버가 작곡했다. 백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이 노래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이들을 위한 노래들 중 많은 국가 및 민족들이 공유하는 곡을 꼽으라면 생일 축하 노래로 정착한 ‘Happy Birthday to you’와 셔먼 형제가 작곡한 ‘It’s a Small World’가 될..

[사진의 기억] 새마을운동

중앙SUNDAY 2024. 4. 20. 00:06 새마을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내 고향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던 그 시절, 오늘 본 그곳은 어제 봤던 그것이 아니었다. 지붕 개량, 농로와 마을 길 확장, 하천 정비 등 날마다 마을 사람 수십 명이 모여 삽질하고 흙과 돌멩이를 실어 나르느라 온종일 분주했다. 1970년대 초,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고 소득을 올린다는 새마을운동의 목표는 새마을 노래의 가사처럼 “잘살아보세~”가 키워드였다. 사실 대대로 우리나라 농촌이 잘살았던 적이 있었을까. 대부분 늘 배고팠고 헐벗었고 부족했다. 그러니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난다는 새마을운동에 반대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돌격 앞으로!”의 군인정신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새로운 마을공동체 건설에 앞장섰다. 형식은 종종 내용을..

“너만은 믿었는데!” 30년 단짝친구의 돌발행동?…곧장 갈라선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헤럴드경제 2024. 4. 20. 00:11 [작품편 101. 폴 세잔] 천 위에 올려진 사과 살인 사과와 오렌지 "에밀 졸라, 이 나쁜 자식!" 폴 세잔이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좁은 작업실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세잔은 손에 든 책을 구길 듯 꽉 쥐었다. 그것은 그의 단짝이자 잘나가는 작가, 에밀 졸라가 쓴 소설 〈작품(The Masterpiece)〉이었다. 세잔도 처음에는 졸라가 보낸 이 책을 반갑게 펼쳤다. 그런데, 종이를 넘길수록 기분이 묘해졌다. 책 속 주인공은 가상 인물 클로드 랑티에였다. 나름 안목과 확고한 철학이 있지만, 세상의 인정을 좀처럼 받지 못하는 비운의 화가였다. 랑티에는 그림을 그릴수록 놀림만 받기 일쑤였다. 야심차게 전시회에 나섰지만, 이 또한 결과적으로 조롱만 ..

억눌린 분노의 상징[이은화의 미술시간]〈315〉

동아일보 2024. 4. 17. 23:30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필립스 컬렉션은 미국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다. 1921년 미술품 컬렉터였던 덩컨 필립스가 설립했다. 인상파 이후 유럽 현대미술을 가장 먼저 미국에 소개한 이곳은 현재 5000점이 넘는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다. 그중 필립스가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칭송한 작품이 있는데, 바로 오노레 도미에의 ‘봉기’(1848년경·사진)다. 부호 컬렉터는 어째서 민중 봉기를 그린 그림에 매료됐을까? 필립스는 피츠버그의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업보다는 가문의 돈을 잘 쓰는 데 진심이었던 터라 열정적인 미술품 수집가가 되었다. 30대 초 아버지와 형을 차례로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진 그는 자택 안에 가족을 기리는 필립스 메모리얼 갤러리를 설립했다. 화가 마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