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 5242

[사진의 기억] ‘리알 포토’로부터 온 춤

중앙SUNDAY 2024. 3. 30. 00:04 가볍게, 발들이 들려있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흰 고무신과 모시 바지, 치마에도 무게가 없다. 풍성한 주름들은 곧 여성을 따라 풀릴 준비를 마친 듯하다. 이미 고무신이 걸음을 뗐다. 보이지 않지만, 남자의 팔은 아마도 그의 다리처럼 허공을 슬며시 들어 올리고 있을 것이다. 어떤 현장의 부분, 인물들의 일부만이 담겨있을 뿐인데, 정사각의 사진 안에 춤이 가득하다. 한국의 대표 사진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황규태의 ‘블로우업 bLowup’이다. ‘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사진은 원래, 1968년 어느 날 서울 뚝섬의 한 너른 마당에 군중들이 모여 춤을 추는 모습을 찍은 ‘리알 포토’(리얼리즘 사진)였다....그 중 한 쌍의 하반신만을 자르고 확대한 것이다..

[미술 다시보기] 불안한 여인의 초상

서울경제 2024. 3. 28. 06:00 ‘흰 담비를 안은 여인’은 서구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다. 1490년께 제작된 이 그림은 매우 독특한 구성을 지닌 초상화다. 그림 속 주인공은 화면 한쪽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반신이 향한 곳과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모습이 왠지 불안해보인다. 게다가 그는 애완동물로는 적합해보이지 않는 흰 담비를 안고 있는데 이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유사한 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이 그림 속 주인공은 체칠리아 갈레라니다. 젊고 아름다웠던 그는 밀라노 공국의 수장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과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1491년 스포르차 공작이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며 버..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4] 어느 내부 고발자의 죽음

조선일보 2024. 3. 25. 03:03 Jean-Michel Jarre ‘Exit’(2016) 기체 결함으로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보잉사의 조립 공정 문제점을 폭로했던 존 바넷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시의 한 호텔 주차장에서 총상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미국 내 소셜미디어에서는 ‘미국 자본주의가 내부 고발자를 대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나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같은 실망스러운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십년간 미국 사회를 강타한 가장 강력한 내부 고발자는 국가안보국(NSA) 소속 프로그래머였던 에드워드 스노든이다. 어릴 때부터 수재로 불렸던 그는 뛰어난 컴퓨터 능력으로 중앙정보국(CIA)을 거쳐 NSA에서 정보 보안 전문가로 일했다. 하지만 개인의 일거수일투족..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지친 삶을 위로해주는 노을빛

한국일보 2024. 3. 25. 04:31 지난주 절기상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이 지나갔다. 이젠 낮이 점점 길어져 달을 보며 힘겹게 출퇴근하던 직장인들이 주변이 환할 때 회사를 다닐 수 있게 됐다. 한강에 노을이 붉게 물든 저녁 무렵 반포대교를 찾아갔다. 태양이 다리 아래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퇴근길 버스 안에는 하루 종일 일과에 시달린 직장인들이 가득했다. 붉은 햇살이 버스 안에 스며들 때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 강렬한 빛은 버스 안 사람들을 보듬으며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다. 최근 사과 대파 등 생활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가계 부채는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서민들은 점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급여는 물가 상승 속도에 한참이나 뒤처져 ..

‘망작’이라더니 1초에 1억씩 뛰었다…당신이 모를 수 있는 비밀이 [0.1초 그 사이]

헤럴드경제 2024. 3. 23. 23:59 수정 2024. 3. 24. 00:26 ⑥ 에드바르 뭉크 ‘절규’ 나는 두 친구와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질 무렵이었고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죽을 것 같은 피로를 느낀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몸을 기댔다. 불의 혓바닥과 핏물이 검푸른 협만과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었지만 나는 혼자서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때 나는 거대하고 무한한 자연의 절규를 들었다. 극도의 불안에 떨었던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 이 글은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절규(The Scream)’와 함께 그가 남긴 일기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서리를 치며 괴로워하는 그림 속 남자의 고통이 느껴지시나요. 그런데..

“아! 앞이 안 보인다” 인기 거장의 위기…수술도 차일피일 미룬 이유[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헤럴드경제 2024. 3. 23. 00:12 [97. 클로드 모네] 언젠가부터 눈이 침침했다. 하늘이 차츰 노랗게 보였다. 수풀 또한 점점 불그스름한 모습을 띠었다. 있지도 않은 안개가 떠다니는 듯도 했다. 1912년 어느 날, 이러한 이상함을 느낀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볐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붓을 놓고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눈은 계속 불편했다. 정도가 심할 때는 아예 온 세상이 뿌옇게 보이기도 했다. 모네는 결국 안과를 찾았다. "내 눈이 왜 이렇소?" 의사에게 물었다. 약만 며칠 먹으면 낫는다는 말을 바랐지만, 의사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모네 선생님.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대체 ..

사진가로 47년, 그는 빛과 어둠 사이 방랑자였다

중앙SUNDAY 2024. 3. 23. 00:30 고 김중만 사진작가 첫 번째 회고전 3월 22일부터 4월 21일까지 ‘10꼬르소꼬모 서울’ 청담점에서 고 김중만 사진작가의 첫 번째 회고전 ‘여전히 꿈꾸는 자’가 열린다. 김 작가는 폐렴으로 투병하던 중 2022년 12월 31일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의 1세대 사진가로 활약한 김 작가는 2000년대 패션·상업사진의 대가로, 배용준·전도연·정우성·이정재·이병헌·비 등 100명이 넘는 스타들의 초상사진가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영화 ‘괴물’ ‘타짜’ ‘달콤한 인생’ 등의 포스터도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2006년 더 이상 상업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공표한 후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작업으로 독도 시리즈, 중랑천 뚝방길 나무 시리즈 등에..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3] 의사 앞에 선 환자

조선일보 2024. 3. 18. 03:01 수정 2024. 3. 18. 05:23 AJR ‘Karma’(2019) “시간, 시간이 다 된 건 알아요/ 하지만 자꾸 슬픈 생각들이 엄습하고 멈출 수 없다면 어떡하죠/ 제가 왜 이렇게 허무한 지 진단이라도 좀 내려주세요/ 제발 처방만 내려주시면 무조건 따른다고 약속할게요..." 주치의 앞에 선 환자는 절박하다. 그리고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다. “나아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난 나아지는 기분이 안 들까요(You say that I’m better, why don’t I feel better)?”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애덤 멧, 잭 멧, 라이언 멧(팀명인 AJR은 이 삼형제의 이름 앞글자들을 따와서 만든 것이다)으로 구성된 뉴욕 출신의 이 트리오는 정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