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 5242

[사진의 기억] 아버지의 ‘살갗’으로부터

중앙SUNDAY 2024. 4. 13. 00:06 수정 2024. 4. 13. 01:37 “아버지와 나 사이는 내가 열일곱 살이 된 어느 날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늙고 처진 아버지의 살갗을 보고 울컥하던 순간, 관계의 변화를 직감했다. 그 감정을 이해하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다.” 그때부터 렌즈를 사이에 두고, 아들의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돋보기를 쓰고 책 속에 깊이 묻힌 봄날의 아버지, 거친 수렁을 톱과 쇠스랑으로 일궈 논을 만드는 여름날의 아버지, 그 논에서 쌀을 수확해 가을볕에 말리는 아버지, 낡은 지게로 땔나무를 지어 날라 장작불을 지피는 한겨울의 아버지…. 아버지가 강원도 화천의 산골 집을 벗어나 제주도로 향할 때면, 카메라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강정마을에서 깃발을 높이 들고 투쟁하는 ..

[C컷] 봄의 추억을 “찰칵!“

조선일보 2024. 4. 11. 07:01 올해 봄 꽃 풍경들 기자는 겨울을 싫어한다. 그래서 봄이 더 반갑다. 추위가 잦아들고 3월 초가 되면 부산 배화학교 벚나무에 꽃이 피었나 확인한다. 다른 벚나무보다 빨리 개화 하는 편에 속한 부산 배화학교 벚꽃을 찍으면 진짜 봄이 왔다고 느낀다. 올해는 대부분 지역의 벚꽃 개화가 예상보다 늦어져 벚꽃 없는 벚꽃 축제를 연 곳이 속출했다. 그래서 늦게 핀 만큼 더욱 반가웠다. 언제부터 꽃을 좋아했나 생각해봤다. 대학 시절 동기,선후배 다 모아 십시일반으로 빌린 잘 안 나가는 승합차 타고 ‘하하호호’ 하며 늦은 밤 도착한 경남 진해 여좌천에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며 ‘꽃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처음 느꼈다. 15년 전 그날 밤 꽃을 보며 감상에 젖던 청년의 감성은..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부끄러움을 일깨워 준 화엄사 홍매화

한국일보 2024. 4. 8. 04:31 어둠이 내려앉은 산사의 밤은 적막감이 감돈다. 단, 지금 이 시기 전남 구례군 화엄사는 예외다. 300년 된 홍매화를 보려는 발길이 전국에서 밤낮없이 이어진다. 이런 북적거림이 싫어서였을까. 매년 마음에만 두고 있던 화엄사 홍매화를 찾았다. 사찰 정문인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들어서면 사천왕상이 맞아준다. 험상궂는 인상에 콩닥콩닥 뛰는 가슴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눈앞이 환하게 빛난다. 한밤중에도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는 홍매화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300여 년 역사를 안은 고목의 자태와 그 속에 피어난 붉은 꽃잎은 숭고함과 함께 신비로움을 더한다. 굵은 몸통과 이끼 낀 나무껍질은 오랜 세월 모진 풍파를 견뎌온 우리 민족의 애환을, 핏빛의 매화꽃은 어려움 속에서..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06] AI가 만든 음악

조선일보 2024. 4. 8. 03:00 Benoit Carré (2016) 1997년 IBM의 수퍼컴퓨터가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다. 그리고 2016년, 구글의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는 당시 세계 챔피언 이세돌 9단을 상대로 다섯 판 중 네 판을 압도하며 승리했다. 이 세기의 대결을 두고 바둑과 컴퓨터 전문가 대부분이 이세돌의 승리를 예측했지만 ‘인간계’의 최고수는 고작 1승을 따내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 1승은 공식 대국에서 인간이 알파고를 상대로 따낸 유일한 승리로 남는다. 인공지능이 이세돌 9단을 무너뜨렸던 바로 그 해에 소니의 CSL 연구소에서 개발한 플로 머신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이 곡을 포함한 인공지능 작곡 팝음악 두 곡을 세상에 선보인다. 이 노래의 작사와 편곡은 프랑스..

아내 버리고 29살 연하와 밀애…1000억 훌쩍 ‘전성기 작품’ 수두룩 [0.1초 그 사이]

헤럴드경제 2024. 4. 6. 23:59 수정 2024. 4. 7. 00:41 ⑦ 파블로 피카소 첫 아내 올가·전성기 이끈 마리… 끝나지 않는 여성편력이 작품으로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할아버지의 걸..

“여보, 이제 그만좀” 5살 연하 아내 졸졸 따라다닌 방구석男,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빌헬름 하메르스회 편]

헤럴드경제 2024. 4. 6. 00:12 [작품편 99. 빌헬름 하메르스회] 휴식 책상 앞에 있는 여인 이젤이 있는 인테리어 그녀는 겨우 마음먹은 대청소를 끝낸 걸까. 간만에 텃밭 한 바퀴를 돌며 잡초를 뽑고 들어온 것일까. 그게 아니면, 종종 참석해야 하는 모임에서 힘을 다 빼고 돌아온 것일까. 그녀를 지치게 한 게 뭐였든, 당장은 해방의 순간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속 편히 머리카락을 묶어 올렸다. 옷 또한 평소 쉴 때나 입던 투박한 블라우스와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손에 잡히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상체를 등받이에 바짝 기댄 채, 이것만으로는 아쉬워 오른팔을 그 모서리에 살짝 얹었다. "이제 좀 살겠어…." 그녀의 혼잣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간 할 만큼 했으니, 이 순간만큼은 멍하게..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유연함·강인함을 갖춘 버드나무

한국일보 2024. 4. 1. 04:30 여의도 샛강공원은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긴긴 겨울엔 가지들이 잎을 떨구고 ‘산발’로 지냈지만 지금은 그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면 가지들이 연초록색 파도를 일으킨다. 여의도 빌딩 사이로 아침 해가 솟아오르자 새벽어둠 속에서 깨어난 버드나무 가지에선 연초록 새싹들이 빛을 내뿜는다. 얼마 후면 풍성한 녹색 물결로 바뀔 테지만 버드나무는 요즘 빛깔이 일 년 중 가장 예쁘다. 예로부터 강 옆에는 버드나무가 많이 자란다. 이 나무가 홍수와 가뭄 등 척박한 환경에서도 무럭무럭 크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잘 휘어지고 복원이 빠른 버드나무의 유연성에서 역경을 이겨내는 강한 생명력을 배우기도 했다. 거친 비바람에도 유연함으로 꺾이지 않고 살아..

“저 사람이 내 아빠예요?” 도끼눈 뜬 막내딸…‘이 가족’ 가슴 아픈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일리야 레핀 편]

헤럴드경제 2024. 3. 30. 00:11 [작품편 98.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신병 배웅 그날은 기분 좋은 휴일이었다. 소파에 등을 기댄 노인은 조용히 콧노래를 불렀다. 피아노에 손을 올린 여인은 그 음에 맞춰 동요부터 민요, 유행가까지 막힘없이 연주했다. 아이들은 발끝에 닿는 햇빛을 문지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카메라가 있다면 그대로 찰칵 찍은 뒤 액자에 모셔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부엌에선 앞치마를 두른 하녀가 경쾌하게 도마를 두드렸다. 이어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음식이 다 된 모양이었다. 이들은 식사 후 나들이를 갈 생각이었다.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따뜻한 홍차를 마실 요량이었다. "사모님, 지금…." 시작은 하녀의 조심스러운 노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