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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향연] 걷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되나니

바람아님 2015. 3. 11. 09:10

(출처-조선일보 2015.03.11 김민정 시인)

仁川 근대문화거리 걷노라니 '문화'는 없고 무모한 치장만
일본 福고양이는 왜 서 있을까… 무작정 成形에 '역사'도 실종
느린 걸음이 눈을 틔워줬건만 開港길 곳곳서 무안만 느껴


	김민정 시인 사진
김민정 시인

가끔 좀 걷습니다. 마스크 쓰고 두 팔을 겨드랑이께로 올려붙인 채 걸음아 나 살려라 앞서 나가는 

잰걸음과는 거리가 먼 느려터짐이 제 속도라고나 할까요.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왜 걷느냐고 반문하는 게 요즘의 제 삐딱함이라고나 할까요. 

뛰기 아니면 눕기 사이의 걷기. 굳이 매일같이 어이없게 만드는 뉴스거리를 보태지 않아도 

우리 저마다 한숨거리가 나날이 늘어나는 현실입니다. 

걷다 보면 다닥다닥 붙은 가겟집 간판도 다시 읽게 되고, 전봇대 아래 오줌을 누는 개의 엉거주춤한 

자세도 다시 보게 되고,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지나쳐가는 차의 기종과 번호도 다시 외우게 되니 

이래서 걷기더러 살기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저녁 약속이 있어 인천 중구 일대를 걷게 되었습니다. 

근대문화거리가 새로 조성되었다고 하여 호기심도 생기던 차였습니다. 

나고 자란 곳이지만 관광객처럼 작정하고 둘러본 기억이 가물거려 운동화 끈 조여 매고 찬찬히 둘러보는데 

몇 발 못 딛고 그만 욕을 씩 뱉고 말았습니다. 

길가에 가로수가 나무랍시고 줄줄이 솟아 있긴 하였는데 온갖 색색 조명으로 밑동부터 가지 끝까지 온몸이 칭칭 감겨 있던 

겁니다. 좁은 도로 양옆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전선이 겹겹 잇고 있었는데 그 위로 별별 색색 조명이 다닥다닥 걸려 있었던 

겁니다. 그중 압권은 낙타를 탄 사람 형상이었습니다만, '1883년 개항누리길'이라는 안내판이 무색할 지경은 감출 수 없는 

무안이었습니다.

무릎이 턱 꺾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를 가지고 뭘 하긴 해야겠는데 뭘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니까 일단 불부터 밝히고 보자 하는 무지를 넘어선 

무모함이 참극(慘劇)을 넘어선 슬픔으로 다가온 듯했습니다. 오래된 건물의 차가운 외벽을 만질 때면 느껴지는 아릿하고 

비릿한 침묵으로 2015에서 1883을 빼는 계산이나 해보았습니다. 자그마치 132년,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의 대작(大作)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1883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여전히, 아직도, 그 시간을 더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대감으로 느긋하게 돌을 올려가며 전 세계 관광객을 싹쓸이하는 가운데 주차 안내 요원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줄 서 

있다가 차이나타운의 이름난 중국집 2층에 올라가 신나게 자장면이나 비벼대는 나는 또 뭔가 싶으니까 순간 그 맛난 면이 

질긴 고무줄처럼 씹히는 것도 같았습니다.

생각하니 답답하고 실천하려니 막막하고. 그것이 우리가 배워온 문화의 정의다 싶으니까 관료가 바뀔 때마다 문화라는 

얼굴에 아무렇게나 칼을 대고 여기저기 주사나 놓기밖에 달리 방법이 있었겠나 싶은 자조(自嘲) 속에 문득 섰습니다. 

1930년대 모더니즘 건축의 한 양식으로 외관을 구성하는 스크래치 타일 띠가 퍽 인상적인 건물인 인천 중구청. 

등록문화재 249호이기도 한 이 건물 맞은편에는 큼지막한 고양이 두 마리가 한 손 귀엽게 든 채 반기고 있었습니다. 

일본 인력거와 더불어 복을 부른다는 일본의 빨간 복고양이가 왜 여기에 서 있을까. 

대체 이 조화는 누구 머리에서 시작된 걸까 궁금하던 참에, 여길 좀 봐 하나 둘 셋, 

부모들이 아이들을 그 앞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 정다운 풍경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인천 중구청이 언제부터 어떻게 여기에 서 있게 되었는지 묻고 답하는 분위기를 기대한 건 그야말로 희망이었을까요. 

개항 당시 각국 거리를 조성했다는 길 위에서 나는 인천을 찾았습니다. 

대체 인천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 사달이 비단 인천만의 일일까요.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로 시작하는 노래 '나그네 설움'

이 기가 막힌 제목 속 두 단어의 조합이 '나'와 '인생'을 바로 지칭한다 할 때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알아먹을 것도 같습니다. 

일단 걸어보면 좀 보인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