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03-26
고미석 논설위원
한국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에서 전한 영국의 대학 풍경이다. 우울한 색채의 청춘의 초상이 닮은꼴이다. 영국의 스펙 열풍도 우리 못지않다. 어떤 동아리는 불우가정을 찾아가 책을 읽어 주는 프로젝트에 자원봉사자 20명을 모집하는 데 170명이 몰려와 ‘제발 뽑아만 달라’고 읍소했단다. 수학과 외국어 전공 학생은 앞다퉈 초중학생 무료 과외에 나선다. 대학이 취업사관학교처럼 바뀌고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청춘을 메마르게 보내야 하는 상황을 교수들은 개탄하지만, 교수처럼 정규직장을 갖는다는 보장이 없는 학생들 심정은 절박하다.
세계화로 인해 지구가 평평해졌다고 하더니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외쳤던 기성세대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던 것인가. 지금 청춘남녀에겐 질풍노도의 시간을 불태울 만한 파티의 불씨조차 보기 힘들다. 저성장이 고착된 21세기의 팍팍한 현실은 캠퍼스에서 얌전하게 통과의례를 거친 어린 양들을 바로 불확실한 미래 속으로 몰아세운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청춘들이 너무 일찍 포기하거나 공포에 짓눌려 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최근 방한한 전자결제시스템 ‘페이팔’의 창업자 피터 틸은 “우리는 경쟁에 최대한 저항할 필요가 있다”며 ‘창조적 독점’의 개념을 강조했다. 별것 아닌 일에 과잉 경쟁하며 기운을 빼거나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무(無)의 상태에서 새롭고 유일한 것을 만들라는 주문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열정을 쏟아 잘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고유한 독자성을 살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핵심 성공 비결이다.
서구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또래들 시선을 의식하고 부모의 기대 등 외부 평가에 유별나게 민감한 면이 있다. 자기 앞의 길을 선택하는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바깥세상의 찬사와 보상에 연연하지 않고 전문영역에서 제 몫을 다하는 사람들을 주목한 ‘인비저블’이란 책에서 배울 점이 있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 가치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외부의 인정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매우 뛰어난 능력이다.”
젊은 세대는 스스로를 속단하거나 남의 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내면 성찰과 더불어 자신을 주체적으로 평가하는 두둑한 배짱을 더 길렀으면 좋겠다. 그들은 갈림길에 서 있다. 남과 똑같아지기 위해 기를 쓰고 치열한 경쟁 대열에 합류하거나, 두려움을 떨치고 유유히 나만의 영역을 개척하거나.
일자리 절벽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 개선은 더디고 수시로 바뀌는 취업시장 변화도 취업장수생들을 맥 빠지게 만든다. 자식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순 없어도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은 부모 세대의 몫이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라고 다그치지만 말고 혹여 자식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려 할 때 머뭇거리지 말고 응원해야 한다. 살아 보니 인생에 정답은 없더라, 젊음을 통과한 세대로서 스스로 체득한 세월의 진실을 들려주면서. 간디가 말한 대로, 방향이 틀렸다면 속도를 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미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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