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논설실장
우선 성완종은 중앙 정치무대에선 존재감이 없었지만 지방에선 다르다. 전국 단위의 선거를 지휘해 본 여야 핵심 인사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서산장학재단 출신이 2만 명이 넘고, 충청포럼은 나름 탄탄한 조직이다. 누가 그의 돈과 조직을 탐내지 않았겠는가? 충청 표를 생각하면 성완종을 결코 건너뛸 수 없었다.” 거물 실세들이 줄줄이 엮이고, 검찰의 칼춤에 여야가 일제히 숨죽이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성완종의 ‘돈질’이 어디에 집중됐는지도 살펴볼 대목이다. 그동안 대선과 총선은 몰라보게 깨끗해진 게 사실이다. 선관위의 철저한 감시 아래 선거비용은 전액 국고에서 지원된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빈틈이다. 바로 여야 대선후보 경선과 당 대표 선거가 그것이다. 이 둘은 정당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이유로 투·개표 과정만 선관위에 위탁한다.
하지만 골육상쟁이 더 잔인한 법이다. 2007년의 이명박-박근혜 대선후보 경선은 본선보다 훨씬 치열했다. 당 대표 경선도 공천권의 운명을 쥔 진검승부다. 여의도에 선거캠프를 차리고 전국 조직을 풀가동한다. 현실적으로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국고보조금은 한 푼도 없다. 그 수급 불일치는 캠프가 ‘알아서’ 메워야 하고, 온갖 ‘검은돈’이 파고들기 마련이다. 성완종의 자금 살포가 대선후보 경선과 당 대표 선거에 집중된 비밀도 여기에 숨어 있다.
이런 ‘돈 드는’ 정치환경을 외면한 ‘정치 개혁’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선거의 승자는 전주(錢主)에게 로비와 특혜로 보답할 수밖에 없다. 바로 성완종이 말한 ‘신뢰’관계다. 이런 잘못된 관행을 끊으려면 우리 사회도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길게 보면 대선후보·당 대표 경선을 선관위에 완전 위탁하거나 선관위가 법인·단체들의 정치자금을 기탁받아 경선비용을 보전해 주는 것도 방법이다. 불법 로비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감안하면 훨씬 경제적이다.
이런 중장기적 처방과 달리 당장 발등의 불은 후임 총리 인선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2일간 중남미 순방에서 돌아와 몸져누웠다고 한다. 단지 해외 강행군 때문만이 아닐 수 있다. 다음 총리 문제가 대통령의 심신을 괴롭히는 진짜 괴물일지 모른다.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도 이렇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자신 없다. 예상 인물을 접촉해 보면 대개 손사래 친다. 민정실에서 아무리 열심히 검증해도 어디서 펑크 날지 몰라 겁난다.”
총리 인선은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가 된 지 오래다. 침대 크기에 맞춰 길면 사지를 자르고, 짧으면 팔다리를 찢어 죽이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박 대통령의 고질적인 신비주의도 문제다. 지금은 누굴 지명해도 ‘문고리 3인방’이 얼마나 개입했는지, 혹시 ‘8인방’이나 정윤회씨가 뒤에서 천거한 게 아닌지 온갖 의혹이 어른거릴 게 분명하다. 다음 총리가 언제 ‘제2의 성완종’ 지뢰밭을 밟을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은 그 정치적 부담을 미리 분산시켜야 집권 후반기를 순항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를 뽑을지보다 어떻게 뽑을지가 훨씬 중요하다. 시간이 걸려도 총리 추천위원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실험을 해 보면 어떨까 싶다. 인사청문회가 두려워 야당에 추천권을 넘기는 건 비겁하다. 대통령 책임제에도 어긋난다. 차라리 전직 총리 등 사회적 존경을 받는 각계 인사들의 지혜를 구해 복수의 후보를 가려내고, 대통령이 그중에서 최종 선택하면 어떨까. 이 실험이 성공하면 훌륭한 제도적 장치로 굳어질지 모른다. 더 이상 ‘인사권=대통령의 고유 권한’에 집착하는 건 정치적 사치이고, 우리 사회도 한 번쯤 제대로 된 총리를 가져 보고 싶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