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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세상읽기] 事人如天과 他人能解

바람아님 2015. 6. 24. 18:48

(출처-조선일보 2015.06.23문갑식 선임기자)

300억원 들여 한일고 설립한 6·25 월남민 의사 한조해씨
빈자들에게 쌀 年 30가마를 내준 조선시대 운조루 집안
義兵 역할 맡아 준 民草들이 이 땅을 지켜온 원천 아닐까


	문갑식 선임기자
문갑식 선임기자
'한일한의원'은 서울역 맞은편 후암동 비탈에 있다. 
1953년 문 열어 1987년 지금의 4층 벽돌 건물로 바뀌었다. 
여기서 환자 50만명을 돌본 한조해(韓祖海) 선생이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하늘처럼 섬겨라)' 네 글자를 
유언으로 남기고 여든넷 삶을 마친 게 1997년이었다. 
지금은 아들인 한의사 한동현씨(53)가 병원을 지키고 있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 한일고 뒷산에 무덤 2기가 있다. 
상석(床石)이나 비석 대신 좌우의 영산홍(映山紅) 두 그루가 묘를 지킬 뿐이다. 
그 영산홍에 학생들 이름표가 걸려 있다. 누군가 소원을 빌려고 달았는데 효험을 보자 너도나도 매달았다고 한다.

무덤의 주인공은 한일고 설립자 한조해 선생과 2001년 사망한 부인 홍종숙 여사다. 
두 분은 증손자뻘인 학생들의 방문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웃고 있을 것이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나무에서 반짝이는 이름표가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예쁠 것 같았다.

함경남도 정평군 봉양면에서 태어난 한 선생의 일생은 '기구하다'는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다. 
가난으로 공부도 제대로 못 했고, 돈이 없어 사고당한 남동생을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채 잃었다. 
6·25전쟁은 그를 남(南)으로, 처자식을 북(北)으로 갈랐다. 
14번 응시한 끝에 한의사 자격증을 얻어 고생 끝에 낙(樂)을 보나 싶었는데 재혼한 아내와 사이에서 낳은 금지옥엽 딸을 
교통사고로 보냈다. 그런 그가 전 재산 300억원을 학교에 바쳤다. 
특목고도 사립고도 아닌 '농어촌 일반계고' 이사장인 그는 아무 연락 없이 촌로(村老)처럼 훌쩍 학교에 와 학생들 잘되게 
해달라고 치성 드리곤 표표히 사라졌다. 
잘난 행세 한번 해본 적 없는 '교육 의병(義兵)'의 길은 아들 한씨가 이사장으로 대를 이어 걷고 있다.

전남 구례 운조루(雲鳥樓)는 꽤 알려진 곳이다. 1776년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선생이 지은 집으로 조선 선비 가옥의 
멋이 잘 보존돼 있다. 이 집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한옥 그 자체가 아니라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헛간에 놓여 있는 뒤주다. 
원통형 뒤주의 아랫부분에는 사각형 마개가 있다. 그것을 열면 쌀이 솔솔 쏟아진다. 
바로 옆에는 더 큼지막한 사각형 뒤주가 있다. 작은 뒤주의 쌀이 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채워놓는 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원통형 뒤주 마개에는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다른 사람이 열어도 된다)', 즉 아무나 쌀을 가져가도 된다는 뜻이다. 
운조루 주인들은 매년 쌀 30여 가마를 이렇게 배곯는 이웃을 돕는 데 썼다. 놀라운 것은 뒤주가 있는 위치다. 
구걸하는 이들의 심정을 고려해 사람들 눈에 제일 안 보이는 자리에 놓아둔 것이다.

운조루의 굴뚝은 1m 남짓으로 특이하게 낮다. 밥 짓는 냄새가 가난한 주변에 퍼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사람은 사흘 굶으면 김 모락모락 나는 밥에 환장(換腸)하고 만다. 동학란과 6·25전쟁 때 그들을 지킨 건 이웃이었다. 
이웃들은 누군가 해코지하려면 앞장서 "이 집만은 안 된다"고 막아섰다. 운조루 사람들은 '복지(福祉) 의병'인 셈이다. 
나라가 할 일을 대신 했으니 그런 호칭을 받아 마땅하다.


	[문갑식의 세상읽기] 事人如天과 他人能解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혹자는 운조루와 한일고의 흥성을 풍수로 해석한다. 
운조루는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 또는 금거북이 들어오는 금구몰니(金龜沒泥), 
한일고는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 땅이라지만 제아무리 명당도 못된 인간에게 복을 줄 리는 없다.

요즘 한 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 산하(山河) 구석구석을 밟고 다닌다. 
105년 전 일본에 망했고, 65년 전 공산당에 거의 망할 뻔했으며, 가깝게는 세월호부터 메르스 사태까지 바람 잘 날 없는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고 끝내 버티는 힘의 원천이 너무도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한일고·운조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봤는데 눈을 넓히니 처처(處處)에 지사(志士)였다. 
조광조 선생의 능주 유허(遺墟)를 지키는 최종채 선생, 뇌일혈 후유증을 채 씻지 못했으면서도 강진 다산초당을 돌보는 
김재보씨나 윤동환 전 군수 같은 이들이다. 화순에서 소쇄원·식영정 보존에 20년 가까운 세월을 바쳐온 이동호씨는 또 어떤가. 
이런 경이(驚異)를 목도하며 나는 이 땅을 지탱해온 힘이 평소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다 위기 때 들불처럼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전사(戰士)로 돌변하는 민초(民草)들에게서 나온다는 걸 확신했다.

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메르스는 지도자의 무지, 공무원의 무능, 대형 병원의 무도(無道)함과 그 삼위일체의 화학적 결합으로 
인한 파탄을 낱낱이 발가벗기며 대한민국을 초토화했다. 그런데도 어느새 끝없을 것 같던 공포의 터널 저편에 서광(曙光)이 
비친다. 말할 나위 없이 목숨을 걸고 바이러스와 싸우는 이름 없는 의사·간호사 같은 의료진 덕이다. 
반면 과거 난(亂)만 일어나면 홀로 내빼기 바빴던 '지도자'라는 이들은 낯 뜨겁게도 메르스로 표밭 일구기 경쟁을 벌이니 
이것도 변종(變種) 바이러스의 조화인가?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 사람에게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게 함으로써 응징을 준다'는 말이 있다. 
언제까지 우리는 '의병(義兵)'의 힘에 기대어 구사일생을 반복할 것인가.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믿고 살만한 나라를 만드는 데 광복 70주년이란 세월이 아직도 짧은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