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입력 2015.07.05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15> 호퍼의 ‘아침 햇살 속의 여인’과 커닝햄의 『세월』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 햇살 속의 여인’(1961). |
텅 빈 듯 보이지만 작은 붓질로 채워진 벽, 바닥, 하늘…. 그녀를 둘러싼 그림 속의 모든 것들은 모두 그녀의 얼룩진 삶을 닮았다. 크게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썩 좋지도 않았고, 큰 사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지워낼 수는 없는 기억과 상처가 자잘한 얼룩으로 남아 있는 여인의 삶.
상처의 시간이건 행복의 시간이건, 시간은 흘렀고 그녀의 몸은 조금씩 탄력을 잃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좀 늦은 듯하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직은 젊은 듯한 나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아침 햇살 속의 여인’(1961)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금까지의 삶으로부터 떠나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그 유명한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했던 그 태양, 어제의 내일인 오늘의 태양이 떠올랐다. 이제는 희망을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을 할 때다. 여인은 기어코 일어나서 단호하게 과거로부터 등을 돌려 시작의 아침을 향했다.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 자신을 위해 새 길을 걸어가다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의 주인공 로라 브라운은 그림 속 여인처럼 홀로 낯선 호텔에 들었다.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남편을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기획한 것도 아니고, 남편의 눈을 피해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로라가 간절히 원한 것은 오직 책을 읽을 수 있는 두 세 시간이었다.
지칠 줄 모르던 책벌레 소녀 로라 지엘스키는 동생의 친구이자 2차 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전쟁 영웅 댄 브라운과 결혼해 로라 브라운이 되었다. 댄은 선량하고 믿음직한 남편이었고 아들 리치는 엄마를 닮은 감수성이 예민한 꼬마였다.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모든 것이 나무랄 데 없었지만, 모두 그녀의 것이 아닌 것처럼만 느껴졌다.
남편과 아들은 모두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그들을 사랑했다. 차이는 하나였다. 남편과 아들은 가진 것을 더 가지고 싶어했다. 그들은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엄마를 원했다. 반면 그녀는 가지지 못한 그것을 원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혼자 책을 두 세 시간 읽는 것, 엄마나 아내 전에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로라는 세상에 통용되는 기준으로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었다. 무표정한 호텔 방에서 홀로 있는 그녀에게 죽음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절망적일 만큼 삶을 사랑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이다. ‘삶. 런던. 6월의 이 순간’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곱씹었다. 로라는 그토록 아름다운 글을 쓰고, 또 삶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에 대해 되풀이 해서 생각했다. 무엇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죽음을 택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강렬하게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울프는 자신의 삶에 가해진 폭력, 그리고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만 세상의 폭력에 넌더리를 냈다. 울프가 원했던 진실된 여성적 세계는 폭력적인 남성적 세계에 의해 처절하게 바스라졌다. 원하는 삶이 주어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판명된 순간, 버지니아 울프는 삶으로부터 스스로 걸어나갔다. 주머니에 무거운 돌을 잔뜩 담은 채. 그녀는 강으로 걸어 들어갔고, 빠른 물살은 수척하게 여윈 여류작가를 단숨에 삼켜버렸다. 로라는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로라는 낯선 호텔 방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부터도 걸어 나왔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직후 자신의 삶을 향해서 떠났다.
가정 대신 도서관을 택한 여자
20세기 말 어느 6월 뉴욕의 아침. 이름 때문에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클라리사는 파티 준비로 분주하다. 커닝햄의 『세월』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던 세 여인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아름답게 변주되는 소설인데, 그 마지막 인물이 클라리사다. 로라와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죽음 앞에 맞닥뜨릴 정도로 절박했지만, 클라리사만은 유독 태평하게 보인다. 그날 아침은 아주 좋았다. 맑은 초여름 아침이었고, “새로운 삶의 확신으로 충만한 그런 아침”이었다.
그날은 친구이자 한 때의 연인이었던 리처드를 위한 특별한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리처드와 클라리사, 두 남녀의 젊은 날의 사랑은 곧 식었다. 나중에는 둘 다 각자의 동성 애인들과의 사랑에 몰두했다. 리처드는 자신의 동성애적 사랑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시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다. 클라리스 역시 동성 애인과 함께 18년 째 평범하고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쉰둘의 클라리사에게 삶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은 더 이상 없다. 대신 도시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특별할 것은 없지만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데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정도의 지혜는 생겼다. 그 삶에 대한 열망이 이 도시를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곳으로 만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열정이 넘치는 도시의 한가운데도 죽음은 피할 수 없이 깃들어 있었다. 사실 리처드는 오래전부터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었다. 시상식을 몇 시간 앞두고 리처드는 투신 자살한다. 수상 축하파티를 위해 주문했던 음식은 장례식 음식이 되고 말았다.
리처드의 장례식에 ‘그녀’가 왔다. 그녀, 리처드의 시에 자주 등장했던 “방황하던 어머니”, “자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일상을 탈출했던 부인”, 로라 브라운이다. 전 남편의 죽음, 음주 운전으로 인한 둘째 딸의 죽음, 이제 아들 리치의 죽음까지 맞이하게 된, 이제 팔순이 된 노인.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버렸던 그 여인은 어떻게 살았는가. 위대한 인물이 되었던가. 아니다. 그녀는 가족을 떠나 캐나다에서 도서관 사서가 되어 평생 책을 읽으며 홀로 조용히 살았다.
리처드의 상처를 알고 있던 클라리사는 로라를 보며 복잡한 심경으로 ‘희망’에 관해 생각한다. 로라의 희망에 관해, 자신의 희망과 행복에 관해, 도시에 모여든 사람들의 엇갈리는 희망들에 대해.
욕망하니까 인간이다
그림 속의 그녀는 마치 우리가 알몸으로 세상에 나오듯 그렇게 빛을 향해 이끌리듯 섰다. 지리멸렬한 가운데서도 살지 않을 수 없고, 아무것도 보장돼 있지 않지만,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듯. 희망은 살아있는 삶의 가장 확실한 징표니까.
그리하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그냥 뜬다. 늘 그래왔듯이. 그 태양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부여하는 의미다. 소설 속의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 인간은 도시를, 그리고 아침을 마음에 품는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은 더 많은 것을 희망한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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