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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당한 룰이 지배하는 곳은 사치스러운 무도회용 드레스 위에 위선과 거짓이라는 장식품이 필수적이었던 사회, 바로 19세기 말 안나 카레니나가 살았던 귀족들의 사교계였다. 권세와 아름다움과 교양, 모든 것을 다 가진 고관 대작의 부인 안나는 야심만만한 젊은 군인 브론스키 백작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사랑을 선택한 대가는 컸다. 안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1878년 처음 발간된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읽히는 걸작이다. 2007년 발간된 『 톱 10 : 문인들의 추천작』은 영국, 호주 등 영어권 문인 125명이 추천한 가장 위대한 소설 10권을 추린 책인데, 이 중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1위를, 『전쟁과 평화』가 3위를 차지했다.
10년을 주기로 4번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롭다. 요즘 태어났다면, 톨스토이는 분명 대단한 영화 감독이 되었을 거다. 러시아 사회를 관통하는 장대한 스토리 라인 뿐만 아니라 장면 구성의 정교함, 심리를 전달하는 미묘한 동작, 스치듯 주고 받는 각 인물들의 시선 흐름까지, 소설의 모든 장면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여자와 사랑의 내면을 파고든 톨스토이
여자, 그리고 사랑에 관한 한 톨스토이는 진정한 천재다. 사랑은 평범한 삶을 단숨에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바꾸어버린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브론스키에게 마음을 빼앗긴 안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집으로 돌아왔다. 역에는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다. 다정한 환대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이상하게 생긴 남편의 귀”였다. 덩치에 비해 가늘고 느린 목소리도 귀에 거슬렸다. 새롭게 눈뜬 감정은 이전에는 깨닫지 못한 불만에 구체적인 이미지와 소리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반면 남들에게는 중요한 사교계 관행은 그녀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톨스토이는 궁극적으로 인간 자체에 대한 천재다. 전지전능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각 개인은 모두 불완전하고 자기 위치에서만 세상을 볼 뿐이다. 다만 사물의 모습이 가장 제대로 보이는 위치에 서있는 인물이 있을 뿐이다. 그가 내세운 인물들 중 흠 없는 인물은 없다. 안나와 브론스키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의 분신으로 알려진 레빈 역시 그렇다. 부족하고 조금씩 흠 있는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시점에서 사태가 묘사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소설에는 가장 종합적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세상이 얻어진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졌음을 가장 잘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그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다.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장면 중 하나인 안나와 브론스키가 함께 춤추는 장면을 보자. 정신없는 무도회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브론스키에게서 청혼 받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던 키티였다.
키티는 안나와 브론스키가 주고 받는 사소한 눈길, 표정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아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벨벳드레스, 짙은 회색 눈동자의 안나가 뿜어내는 생기, 그리고 브론스키의 순종적인 표정. 갓 피어난 사랑으로 그들의 주변 세상은 싱싱하게 물들었다. 20대의 키티가 30대의 안나보다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패배자가 된 키티의 눈에 안나는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으로 보인다.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렸던 크람스코이
브론스키의 눈을 멀게 하고, 키티를 절망에 빠뜨린 안나처럼 검은 머리에 짙은 회색 눈동자의 여인을 그린 그림. 화가 크람스코이는 이런 여인을 그리고는 ‘미지의 여인’이라는 아리송한 제목을 붙였다. 도도하면서도 슬퍼 보이고, 냉정하면서도 마음 속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는 여인. 누굴까? 후대의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을 ‘안나 카레니나’로 해석했다.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이 시작된 1873년 그해, 화가 크람스코이는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후에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 화가 크람스코이를 모델로 한 미하일로프라는 화가를 등장시킨다. 소설 속에서 화가 미하일로프는 안나의 초상화를 그렸다.
소설에서 톨스토이가 묘사하고 있는 초상화 속 안나의 미소는 단순하지 않다. 전체적인 인상은 ‘슬픔’이었지만, 거기에 어떤 ‘도취’된 듯한, 정당하지 않은 ‘승리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안나의 본성인 ‘다정함’을 숨기지는 못하는 매력적인 초상화였다. ‘슬픔’과 ‘도취’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물든 아름다움. 그것은 몰락하는 세계의 징표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헤어지는 사교계의 룰을 따랐다면 파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브론스키의 어머니는 “아들의 불륜을 알고 처음에는 흡족해”했다. 그 상대가 지체 높은 고관대작의 부인이니 아들의 출세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베르테르 식의 지독한 열정”이라는 것이 드러났을 때부터는 문제가 달라졌다.
진실한 사랑의 대가는 경멸과 독설
사랑은 짧고, 고통은 길었다. 그들이 진실한 사랑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우아한 사교계의 모든 신기루는 사라지고 말았다. 차가운 경멸과 독설이 무방비 상태의 그녀를 공격해 왔다.
진실된 사랑을 찾아 상류사회의 틀을 깨고 나왔지만, 안나 자신도 다른 삶의 방식을 알지 못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왔지만, 그녀는 그 시골에서도 온통 외국 제품으로 가득 채운 집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했다. ‘사교계’로 표현된 타락한 귀족 사회 전체의 틀에서 벗어난, 다른 대안적인 삶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그녀는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뿐”이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브론스키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사랑은 더 부족해 보이는 법. “그녀는 그의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낮에는 일로, 밤에는 모르핀으로 잠재울 수밖에 없었다”. 출구를 찾지 못한 안나는 기차역에서 투신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다.
브론스키에게도 긴 고통만이 남았다. 살아있는 안나와는 사랑을 할 수도, 이별을 할 수도 있지만, 죽은 안나와는 사랑도, 이별도,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허무의 끝에 선 브론스키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버린다.
출구는 없는 것일까?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고 나서 농민 계몽운동과 새로운 공동체 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서구화된 귀족들의 위선적이고 타락한 삶을 비판하고 러시아 농민들의 소박함을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과 키티는 톨스토이가 찾은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소설에는 이런 대안적인 삶을 찾으려는 수없이 많은 논쟁이 담겨있다. 이로써 『안나 카레니나』는 단순한 애정소설을 넘어 러시아적 삶에 대한 거대한 보고서, 진정한 인간적인 삶에 대한 탐구가 된다. 거대한 스케일을 꽉 채운 경이로운 디테일. 이것이 톨스토이가 여전히 많은 문필가와 독자를 사로잡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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