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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6>내 세상의 전부인 어머니와 할머니의 그리운 그 실루엣들

바람아님 2015. 7. 10. 12:15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6> 신경림의 시와 구본창의 사진
중앙SUNDAY| 제409호 | 20150111 입력

 

 

구본창의 ‘북청사자놀음 05’(200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희미한 ‘램프불’, ‘칸델라불’, ‘전등불’, 그리고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 좀 더 환하고 강한 빛을 따라 소년은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며 어른이 되어갔다. 신경림 시인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한 소년의 담담한 성장기다.

경제성장기 이전과 이후, 자본의 세계화, 해외여행 자유화로 옮겨지는 사회적 변화라는 지극히 산문적 이야기를 일상적이고 평범한 언어로 꾸려 명료한 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신경림 시의 묘미다.

시인은 그렇게 성장을 거듭하다가 아주 독특한 체험에 이른다.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 이상하게도…시야는 차츰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망막에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다시 이것이 / 세상의 전부가 되”고만 것이다.

20세기 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어왔고, 사회 성원들은 자기를 돌아볼 틈 없이 개발의 빠른 속도에 몸을 맡겨왔다. 무한질주하며 성장하던 우리의 정서 저 밑바닥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로 표현되는 근원적인 고향에 대한 갈구가 분명 있다. 명절 무렵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을 훔치며 당장이라도 고향에 달려가고 싶어진다.

한걸음 더 나가 평범하고 이름 없는 것들에서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데 명수인 시인은 시 속에 멋진 반전을 숨겨 놓았다. ‘실루엣’이 바로 그것이다. 망막에 남은 것은 다만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뿐이다. 실루엣에는 디테일이 없다. 디테일은 성장의 시간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런데 디테일의 망실은 과거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간을 다시 미래로 향하게 한다.

아무리 과거를 사랑해도 그 디테일을 모두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떤 세대도 과거를 단순하게 반복할 수는 없다. 그러니 ‘실루엣’만이 남는 것이 옳다. 실루엣은 말 그대로 우리의 윤곽, 지지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디테일을 채워가면서 다음 세대는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더 나아가서는 실루엣 자체도 수정할 수 있다. 비워야만 비로소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질주를 멈추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새겨보는 일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인류는 후손에게 생물학적인 유전만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생존을 위한 문화적인 유전자 ‘밈(Meme)’을 함께 전해준다. 사회적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는 ‘밈’은 재현과 모방을 되풀이하며 전승되는 언어·노래·태도·의식·기술·관습·문화를 통칭한다. 신경림 시인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바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내재된 ‘밈’의 자각 과정을 시로 보여주는 가장 멋진 예가 될 것이다. 사진에서는 구본창의 작품이 그렇다.

독일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예술가로서의 출발점이 당연히 외국에 있었던 구본창이 전통문화라는 주제로 눈을 돌렸던 것은 작가로서 이미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1998년이었다. 그 시작점은 ‘탈’ 작업이다. 탈 작업을 계기로 그는 “우리가 가진 좋은 소재를 내가 가진 감수성으로 소화하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으니, 그에게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재발견하는 여정이 시작됐다.

흥미롭게도 ‘탈’ 시리즈에서 그가 카메라에 담은 것은 탈춤의 연행 장면이 아니다. 탈을 써서 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보통의 인물사진을 찍듯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람의 몸을 얻은 탈, 혹은 탈의 얼굴을 얻은 사람들의 초상 사진 같은 느낌이다. 탈이라는 사물 자체보다 탈 뒤에 감추어진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보는 저 오롯한 아낙의 뒷모습. 그녀는 북청사자놀음 중에서 탈 없이 추는 춤의 한 대목인 ‘넋두리 춤’의 연행자이다.

아낙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 왜 시인에게 남은 실루엣은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할머니’의 것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일제 강점기와 뒤이은 전쟁의 혹독한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어머니가 대신했던 탓도 있고 개인사적인 사정도 있으리라.

성장 논리에 밀려 잊혀졌던 우리 본연의 모습을 주목하는 태도는 구본창의 작업과도 일맥상통한다. 분명 어떤 카메라는 화려하고 장엄한 순간을 위해서 존재하지만, 구본창의 카메라는 그렇지 않다. 그의 카메라는 “닳아 없어지거나 시간 속에서 점차 잊히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향한다. 곱돌, 쓰다 남은 비누조각, 잎이 다 떨어진 담쟁이가 붙어있는 텅 빈 벽면 같은 것들이다. 좀 번듯한 축에 드는 백자도 구본창의 세계에 오면 더욱 순하고 보드라운 여성적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잘난 갑(甲)을 기념하여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흠집이 있으면 있는 대로 살아가는 고만고만한 을(乙)들을 안고 가는 작업이다. 잊혀지고 희생을 강요당하던 모든 애잔한 것들과의 ‘공명’을 담아내는 것이 그의 예술이다.

노동으로 단련된 듯한 널찍한 어깨에 겸손하게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아낙의 뒷모습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못난 자식이든 잘난 자식이든 내치지 않고 품어주던 그 시절의 넉넉한 어머니들을 떠올리게 한다. 승리한 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쓰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다만 넋두리를 할 뿐이다. 그 넋두리를 함께 나누고 아픔을 어루만져 주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구본창의 사진 앞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것도 아낙의 실루엣에 대한 나의 짧은 생각일 뿐이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아낙의 뒷모습은 여전히 상상을 자극한다. 아낙의 얼굴, 표정, 목소리, 숨결, 살아온 내력 그 모든 것이 궁금하다. 신경림 시인의 ‘실루엣’의 디테일을 채우는 것도, 구본창 작품 속 아낙에 대한 궁금함을 채우는 것도 모두 우리 각자의 몫이다. 어떤 어머니와 할머니를 기억하는가는 바로 자신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 다시 내 ‘세상의 전부’가 되는 법이다.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