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예술가의 돈 걱정…아버지 빚 갚느라 결혼도 못한 미켈란젤로

바람아님 2015. 8. 5. 00:28

매경이코노미 2015.07.27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인 살라이 초상화, 1502~1503년경.

살라이를 좋아했던 다빈치는 살라이의 빚을 갚아주고 옷을 사

입히느라 늘 돈이 궁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딜레마 중 하나는 얼마를 갖고 있든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빈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 역시 당신과 똑같이 돈 걱정을 하며 살았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모네, 반 고흐 등이 평생 돈 걱정 속에서 인생을 보낸 신파 드라마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신과 좀 다른 점이 있다. 물론 시대정신이 다르기도 했지만, 예술가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훨씬 덜 느꼈다. 그들은 가난으로 고통받았지만 절대지존으로서 자존감과 자긍심 그리고 자기애를 지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년의 프랑스 망명 시절을 빼곤 내내 돈 때문에 좌절의 나날들을 보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주 돈이 떨어졌다. 풍족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다방면에 재능이 탁월했던 다빈치는 오히려 그 재능 때문에 돈을 벌 수 없었다. 천재들이 자주 그렇듯 뒷심이 부족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일을 맡으면 끝까지 해내는 적이 드물었다. 회화 15점 중 미완성이 3분의 1 정도가 되니 말이다. 그렇게 다빈치의 재능이 다빈치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알았던 사람은 바로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였다. 다빈치에게 작업을 의뢰한 적이 있었던 로렌초는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그를 고용하지 않고, 멀리 밀라노공국의 스포르차 가문으로 내쫓아 버렸다.

어쨌거나 다빈치는 늘 멋진 망토에 분홍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다녔을 만큼 요상한 멋쟁이였다. 메모장에 가장 많이 적혀 있던 것은 옷 타령이었다. 늘 옷을 살 돈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그는 또한 남색의 대상이자, 아들처럼 생각했던 10대 소년 살라이(지아코모) 등 어린 소년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다빈치는 특히 “도둑이고 거짓말쟁이며 고집 세고 탐욕스럽다”고 묘사했던 살라이의 생동감과 자유분방함, 유머에 매료당했다. 그런 까닭에 특별히 살라이가 진 빚을 갚아줬을 뿐 아니라 그를 성장(盛裝)시켜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또한 다빈치는 가난할 때도 돈이 생기면, 시장통에 판매하던 새장 속의 새를 돈 주고 사서 그 자리에서 풀어줬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의 연출자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던 셈이다.

미켈란젤로 역시 평생 돈 걱정을 하며 살았다. 그는 가세가 기운 귀족 가문의 다섯 형제 중 한 명으로 친모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양모 슬하에서 자랐다. 가족 중 누구도 별 볼 일 없었던지라 오로지 그만이 가족 걱정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는 작은 마을의 시장을 역임하기는 했지만, 불평불만이 많고 빌붙어 사는 무능력자에 불과했다. 미켈란젤로는 엄청난 효자였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자식으로서의 보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쓴다.

“제가 하는 일 모두가 저 자신을 위한 것과 똑같은 비중으로 아버지를 위한 것임을 아버지께서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사랑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곤 했지만, 아버지는 조각가의 꿈을 포기하라는 냉정하고 메마른 답장을 보내기 일쑤였다. 때로는 아버지가 아들 몰래 고객을 찾아가 돈을 미리 챙겨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돈을 지불하지 않아 빈털터리가 된 순간까지 “아버지 살아계셔 주셔요. 세상에 있는 모든 금을 동원해서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부성애뿐 아니라 형제애도 보통 수준을 넘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아버지와 형제들의 빚을 갚아주는 데 온 힘을 다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옷차림은 검소하고 수수했으며, 심지어 궁에 드나들 때 예의를 갖춰 입어야 할 궁중복도 사 입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작업실은 당대 유명 예술가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누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 클로드 모네의 공식 요청으로 1890년 프랑스 정부가

그림을 취득했다. 현재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천장화와 묘지 작업을 둘러싸고 율리우스 2세와 끈질긴 돈 싸움을 벌였는데, 계약서에 서명한 때로부터 8년 동안 얼마간의 돈을 그야말로 쥐어짜듯 타내야 했다고 전해진다. 90세까지 살아서 당대 명성을 누린 작가지만 이렇게 돈 걱정을 평생 짊어지고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리 귀족 출신이라 할지라도 당시 예술가의 위상이 장인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을 방증한다. 전율을 일으킬 만큼 감동적인 미켈란젤로의 명작들은 철딱서니 없는 가족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너무 협소한 생각일까?!

수련의 화가 모네의 가난만큼 전설적인 것은 없다. 식료품 상점 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세상이 다 알 만큼 아주 오랫동안 무일푼으로 지낸 화가였다. 지베르니에 정착해 수련으로 유명해지기 전까지인 쉰 무렵까지, 가난으로 인한 그의 고통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모네는 여러 지인들에게 돈 빌리는 편지를 수도 없이 썼다. 돈을 빌리기 위해 친구들에게 보낸 간절하고 구구절절한 편지들을 보면 그의 가난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마네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술 경기가 나빴던 시절도 아닌데 그림으로 돈을 벌지 못한 까닭은 당대 그의 그림에 대한 낯설음과 반감 때문이다. 인상파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해당되는 모네의 작품은 어떤 아름다운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저 물감을 그린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살롱에서 그의 그림은 완전히 무시당했고, 대중들은 그의 그림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당대 화가들은 다른 화가를 돕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당시 인상주의자의 아지트였던 카페 게르부아의 패거리 중 한 명인 화가 친구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자신의 많지 않은 수입에서 50프랑 정도를 떼어 모네에게 보내줬는데, 이것이 모네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그 돈으로 세 식구가 먹고살기는 힘들었다.

때로 모네는 바지유에게 급전보를 치기도 했다.

“자네에게 가능한 한 빨리 도와 달라는 급한 청을 하느라 몇 줄 적고 있네. 내가 불행을 운명으로 안고 태어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군. 나는 알거지 신세로 여인숙에서 길거리로 내동댕이쳐졌어. 카미유(아내)와 불쌍한 어린 것은 시골로 보냈다네. 나도 얼마라도 보태줄 후원자를 찾아보려고 오늘 저녁에 떠난다네. 내 가족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태도고, 그런 형편이니 내일은 어디서 잠을 청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네. -고통 속에서. 친구 모네가- 추신 : 어제는 너무 절망스러운 기분에 바보같이 강물에 몸을 던지려 했다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네.”

모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줬던 화가는 동료인 마네였다. 마네는 판사 집안 아들로 유산을 넉넉히 물려받은 까닭에 여유 있는 삶을 살았고 주변의 예술가들, 특히 모네를 물심양면 도왔다.

모네가 마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어느 때보다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그저께 부터는 땡전 한 푼 없는데, 푸줏간이나 은행에서도 전혀 외상을 주지 않네. 자네 혹시 20프랑쯤 보내줄 수 없겠나? 당분간은 그 정도로 도움이 될 것 같네.”

마네는 친구들에게 모네의 작품을 모네 몰래 사줘야 한다며, 재능 있는 화가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기꺼이 편지를 쓰기까지 했다. 모네는 그런 마네의 은공을 결코 잊지 않았다. 마네가 51세의 나이에 매독으로 사망했을 때, 모네가 앞장서서 마네를 위한 대단한 일을 해냈다. 1890년, 모네는 동료들과 모금 활동을 펼쳐 2만프랑을 모아 마네의 유명작 ‘올랭피아’를 마네 부인으로부터 사들인 다음 국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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