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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칼럼]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論

바람아님 2015. 10. 6. 08:57

(출처-조선일보 2015.10.06 김대중 고문)

트럼프 공화당 후보 발언, 美 정계 화두로 남을 것
安保 독립은 절실한 문제… 동북아 변화 대비해야
당장 獨立할 수 없다면 미국에 '주는 것' 있어야

김대중 고문 사진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8월 유세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강력한 제조업 경쟁력을 지녔으며 미국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가면서도 자기 나라 안보는 미국의 
희생에 무임승차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국에서) 얻는 게 하나도 없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한국 언론들은 트럼프 후보의 발언을 '막말'로 취급하면서 그가 미국 대통령 경선에서 조만간 
하차(下車)하게 될 것이라며 별로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부 네티즌은 우리의 경쟁력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미군 주둔 비용 일부를 부담하고 있어 완전한 무임승차는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 지원은 미국의 전 세계적 안보 차원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일방적 시혜(施惠)는 아닌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한국 안보 무임승차론'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발언이 미국 보수층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세계 경찰 노릇이 한계에 오고, 대외 문제에 치중하는 동안 미국 내의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 상황이 점차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는 자성과 비판은 이번 미국 대선을 통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주류인 백인층·중산층이 그런 자성과 비판의 중심에 있다.

한국 문제도 그런 비판 대상의 하나다. 
비록 트럼프가 대선 완주에 실패하더라도 그가 던진 화두는 미국 정치에서 주목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미국인 유학생은 한국 TV 프로에 나와 '미국인 사이에 나(자신)라도 미국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말하겠다는 반응'이 
있음을 소개했다.

1980~90년대만 해도 미국인들은 역경을 딛고 성장한 한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곤 했다. 
얼마 전 작고한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는 생전에 필자에게 
"한국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중에서, 그리고 미국이 파병했거나 경제 지원을 한 100여 나라 중에서 
미국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제대로 성공시킨 유일한 나라"라면서 한국은 성공 사례 중에서도 쇼케이스라고 했다. 
미국은 그것만으로도 한국을 도왔던 것에 자부심을 갖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 내의 이런 생각은 시대가 지나면서 퇴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하고, 
미국 주류가 이민·실업·군복무·경제 사정 등으로 방어적·수세적 입장이 되면서 눈앞의 현실 또는 현상에 불만을 갖게 됐다. 
게다가 과거에 자기들이 도와줬던 나라들이 이제는 자기들 수준으로 치받아 올라서면서 이런 낭패감은 더 심해졌다. 
트럼프는 바로 미국 주류의 이런 심정을 파고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다. 
현재 동북아시아의 판도나 형세로 보아 미국 내의 '한국 무임승차론'이 오늘내일 어떤 구체성을 띨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우리가 미국에 '주는 것'은 없어도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미국 여론도 바뀌고 우리 사정도 바뀌고 특히 동북아의 '화약(火藥) 냄새'도 강해질 것이라면 현재의 한·미 군사 동맹에도 
멀지 않은 장래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올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대비해야 한다.

본질적 문제는 언제까지 우리의 안보를 다른 나라의 군사적 지원에 연계할 것인가다. 
세계에서 10위권 내외의 경제력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나라가 자신의 국방을 다른 나라에 부분적이나마 의존하는 경우는 
세계에 전례가 없다. 물론 우리만큼 위험한 화약고의 한가운데 위치한 나라도 드물기는 하다. 
그런 만큼 교호적이고 교차적인 안보의 네트워킹이 필요한 상황이다.

근자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중국은 지난 9월 전승절 행사에서 중국의 '화약'을 크게 선보였다. 
이에 질세라 일본은 안보법을 통과시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업그레이드했다. 
북한은 미사일 실험을 내세우며 핵실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 둘러싸인 한국이 과연 얼마만큼 군사적으로 강해져야 남의 힘에 '무임승차'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을는지 
우리로서도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100년 전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조선(朝鮮)을 가리켜 '자신을 위해 일격도 가하지 못할 나라'라며 
포기했다지만 우리는 1세기 후인 지금에도 과연 '일격'을 가할 독자적 힘을 갖추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안보의 독립이다. 당장 독립할 수 없다면 남의 힘을 돈 주고라도 사야 한다. 
그것은 곧 우리도 우방에서 '얻는 것'이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짜는 오래가지 못한다. 
안보는 미국에 기대면서 국민의 일부는 반미(反美)하고, 일부는 주둔비 부담에 인색하고, 일부는 해군기지 건설을 막고, 
일부는 미국이 해준다는 사드(THAAD)에 쌍심지 돋우고, 급기야는 남의 군사력에 무임승차하는 것에 무감각해지면서 
"설마 전쟁이…"라며 자기최면을 거는 상황이라면 그런 국가의 존재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될까? 
불가피하게 남의 군사력에 '승차'는 한다고 해도 언제까지 '무임'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