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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닌 함께였기에… '디지털 혁명'이 이뤄졌다

바람아님 2016. 1. 10. 08:09

(출처-조선일보 2016.01.09 어수웅 블로그문화부 차장)

빌 게이츠와 폴 앨런,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
'아이디어맨+실현가' 협업 있어야 성과 나타나
천재 강조하는 傳記 넘어 팀워크의 힘 담아내

이노베이터 책 사진

이노베이터

월터 아이작슨 지음 | 정영목·신지영 옮김
오픈하우스|748쪽|2만5000원


"빌과 폴은 열두 시간이 넘도록 코딩에 몰두했다. 

빌은 기운이 달리면 당분 섭취를 위해 '탱' 음료 가루를 손에 조금 부어서 핥아먹곤 했다. 

그해 여름 내내 빌의 손바닥은 오렌지색을 띠었다(…). 

둘 중 누가 사흘 연속, 또는 나흘 연속 연구실 밖을 나가지 않는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앨런과 게이츠는 코딩에 목숨을 건 하드코어였다."(465쪽)

MS의 공동 창업자이자 평생지기였던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의 고교 시절 삽화다. 

여기서 방점은 천재 빌 게이츠가 아니라, 앨런과 게이츠 둘의 관계에 있다. 

한 사람의 기발한 발상이나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아이디어맨 앨런실현가 빌공동 작업으로 창조성이 만개했다는 것.

애플 창립자 전기(傳記)인 '스티브 잡스'의 저자로 익숙한 월터 아이작슨(64)의 신작 '이노베이터(Innovators)'는 

우리 시대 디지털 혁명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는 야심 가득한 도전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밀리언셀러 전기 작가. 스티브 잡스 이전에도 아인슈타인, 벤저민 프랭클린, 헨리 키신저 등 

별도의 수식어가 필요없는 우리 시대 고유명사들의 일생을 때로는 풍경, 때로는 세밀의 화법으로 옮겨 왔다. 

'How a Group of Inventors, Hackers, Geniuses, and Geeks Created the Digital Revolution'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1차적으로 이 책은 디지털 혁명을 꽃피운 수많은 영웅의 전기다. 혁신가, 해커, 천재, 괴짜 백여 명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아이작슨은 1990년대 시사주간지 타임의 디지털 혁신팀장을 맡기도 했다)이 이 안에 있다.


젊은 시절의 빌 게이츠(사진 왼쪽), 젊은 시절의 스티브 잡스 사진젊은 시절의 빌 게이츠(사진 왼쪽), 젊은 시절의 스티브 잡스. 

/오픈하우스 제공


하지만 한 발자국 더 들어가면, 아이작슨은 '이노베이터'가 전기로만 읽히는 것을 

경계한다. 

전기는 천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비범한 개인이 아니라, 

창조적 팀워크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늘 단수가 아니라 복수(複數)다. 

첫 투자 10만달러를 받았을 때 환호성을 지르며 '버거킹 회식'을 결정하는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애플 창립 이전부터 심야의 스탠퍼드 대학 도서관에 함께 잠입해 자료 뒤지던 

대학생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 콤비도 마찬가지다. 

모두 혼자가 아니라 '짝'이었고, 성과는 늘 협업의 결과였다.

'팀워크'에 대한 아이작슨의 집착은 거의 강박적이다. 

이 책에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디지털 영웅이 등장하고, 

그들의 약전(略傳)도 포함되지만, 구성과 목차는 개인이 아니라 주제별이다. 

프로그래밍, 트랜지스터, 마이크로칩, 비디오 게임, 인터넷,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온라인, 웹….

동시대의 협업뿐만이 아니다. 이런 인용이 있다.

"아니, 너는 트위터를 발명하지 않았어. 나도 트위터를 발명하지 않았어. 

비즈(다른 공동 설립자 스톤)도 마찬가지야. 

인터넷에서는 사람들이 뭘 발명하지 않아. 

그냥 이미 있는 생각을 확장할 뿐이야."(678쪽)


트위터의 공동 설립자인 잭 도시가 자신의 업적만을 강조하자 역시 공동 설립자인 에브 윌리엄스의 반박이다. 

얼핏 새 발명은 혁명적으로 보이지만, 이전 세대로부터 전해져온 생각들을 확장하며 다진 결과라는 것. 

아이작슨이 신뢰하는 '협업의 힘'은 이 책의 제작과 완성에도 기여했다. 

이 책 초고를 온라인에 게재한 지 일주일 만에 1만8200명이 원고를 읽었고, 상당수가 자신의 의견을 이메일로 보내왔다고 

한다. 수정과 추가 작업이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700쪽이 훌쩍 넘는 분량이 말해주듯, '이노베이터'가 다루는 범위는 단순히 주제별 혁신에 머무르지 않는다. 

평행선을 그리며 진화하던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이 연결된 뒤 콘텐츠 공유와 소셜 네트워킹이 어떻게 만개했는가에 

대한 미시적 포착부터, 인간과 인간의 협업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협업이라는 거시적 전망까지. 

이 대목을 묘사하면서 아이작슨은 IT나 과학이 아니라 자신이 대학 시절 전공했던 문학의 언어로 독자를 설득한다.

"포유류와 컴퓨터가/ 서로 프로그래밍하며/ 조화 속에서 함께 사는/ 사이버네틱스의 초원."

('미국의 송어낚시'를 쓴 작가 리처드 브로티건에게서 재인용)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쉽지 않은 독서겠지만, 

디지털과 살 수밖에 없는 세대라면 필요한 독서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구경꾼으로만 남을 게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