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의사이자 저명한 작가인 올리버 색스가 타계 직전에 남긴 삶과 학문의 기록이 '온 더 무브'(알마 펴냄)라는 제목의 자서전으로 묶여 한국을 찾았다. 평범함을 드러낸 한 권의 책으로 그는 더 숭고해졌다.
영국 태생의 의사인 색스는 향년 82세로 작년 눈을 감을 때까지 신경과 전문의로 일하며 환자들의 사연을 책으로 펴낸 인물이다. '의사이자 작가'라는 이중생활만이 그를 유명인으로 승격시킨 건 아니다. 1985년작 스테디셀러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환자들의 임상을 기록한 소설 형식의 책으로, 뇌와 정신활동에 대한 그의 기록은 인간 이해의 지평을 넓힌 수작이다. 신경학자의 따뜻한 시선은 현대의학이 나아갈 방향을 선구자적으로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의학계의 계관시인(桂冠詩人)'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이 때문이다. 17세기 영국 왕실에서 국가적으로 뛰어난 시인에게나 붙여주던 명예로운 칭호가 색스에게 붙은 건 우연이 아니다.
결정적 순간을 더듬는 회고나 현재 위치에 오른 뒤 자기과시 따위를 색스는 자서전에서 쏙 뺐다. 대신 색스는 평범하다 못해 아예 흠결로 가득 한 자신의 삶을 벗겨 적극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마음껏 움직여 다닐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갈망해 모터사이클광(狂)을 자처했고, 동성애 커밍아웃에 어머니에게서 "가증스럽구나.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는 멸시를 받아 평생 죄의식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로 삶의 기록을 시작한다.
책은 진지함만으로 꾸며지지 않았다. 농담과 유머가 넘실거려 480쪽이 가볍게 읽힌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열두 살이던 색스에게 한 교사가 "색스는 멀리 갈 것이다. 너무 멀리 가지만 않는다면"이라고 적은 70년 전 생활기록부를 두고 그는 이렇게 썼다. "그 염려가 그리 틀리진 않았다. 어렸을 때 화학실험을 한답시고 집안이 유독가스로 가득 차도록 '너무 가곤'했어도 다행히 집을 홀랑 태워 먹지는 않았다."
삶과 죽음의 갈래에 서봤던 기억도 색스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노르웨이의 한 산기슭에서 거대한 황소와 맞닥뜨린 색스는 "정신을 차려 보니 두 다리를 쓸 수 없을 만큼"의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 황소와의 충돌 후 그는 자신이 "연약한 존재"이자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각성을 경험한다. 죽음의 순간은 삶을 더 소중하게 이끈다. 의사로서, 역시 의사였던 아버지에게 배운 사명감은 색스를 위대한 의료인 반열에 오르도록 이끄는 동력이었다. 아흔에 가까웠던 아버지는 여전히 왕진을 다니며 색스에게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이 의료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환자의 내면 사정까지 이해하려 했던 색스의 아버지가 전 세계인이 추모하는 색스를 길러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2월 19일, 색스는 '뉴욕타임스'에 특별기고문을 올렸다. 2005년 눈에 발병했던 흑색종이 간으로 전이돼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기고백의 칼럼이었다. 색스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문장으로 통찰을 줬다. "모든 인간이 자신만의 길을 찾고 자신만의 삶을 살다가 자신만의 죽음을 맞는 특별한 존재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의식 있는 존재, 생각하는 동물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가 내게는 크나큰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그 후 두달이 흘러 색스는 '온 더 무브'를 출간했고, 그해 8월 눈을 감는다.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악이라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색스의 자서전은 '선(善)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로도 읽힌다. 결국 '온 더 무브'는 누구든 자신의 주변 인물, 주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숭고해질 수 있다는 실험을 몸소 해낸, 색스의 82년에 걸친 실험보고서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특별한 행위가 아니며, 내면의 무게중심을 상대방에게 살짝 옮김으로써 가능하다는 불변의 진리가 그 보고서의 결론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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