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하게도 나는 수원 화성 안에 들어오면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걸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도시 안에 대학이 있고, 대학이 곧 도시 자체인 곳, 그래서 인재들이 아주 오래된 문화재 속에서 숨 쉬고 살면서 현재의 문제와 미래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곳.
물론 지금의 수원 화성 안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 반대로 여기는 개발 제한으로 거의 슬럼화 되어 있다. 하지만 수원화성 안에 좋은 대학이 들어선다면 중국이나 일본 등의 외국 대학생들이 가장 유학 오고 싶어하는 곳이 될 것이라는 신념 비슷한 것을 나는 갖고 있다.
◆ 수원화성을 걷다가 옥스퍼드 거리가 떠오른 까닭은?
수원에 와서 ‘정조의 음식’을 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팔달문 옆 영동시장에 들러 궁중보양식 삼합미음죽을 시켰다. 정조가 화성행궁에 행차하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해삼 소고기 홍합을 찹쌀에 넣고 죽을 끓여 드렸던 약선 음식. 그 맛을 여유롭게 만끽하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배가 따뜻해지면서 장거리 운전의 피로도 말끔히 씻겨갔다.
가까이에 있는 팔달문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을 먼저 간 것은 왕의 행차 시 가마도 드나들 수 있도록 높고 널찍하게 만든 무지개 모양의 문과, 반달형 옹성, 그리고 우진각 형태의 지붕이 서로 어울려 균형미의 극치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문의 가치는 축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화강암 벽에 있다. 감동(監董) 전(前) 목사 김낙순으로부터 석수(石手) 가선(嘉善) 김상득까지 85명이 참여했다는 글씨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공사실명책임제의 전형적인 증좌(證左)다.
실제로 <화성성역의궤>, 즉 그 당시 성곽을 쌓는 전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책을 보면 “작은 끌톱장이 김삽사리(金揷士伊)”, “목수 박뭉투리(朴無應土里)” 등 숱한 평민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팔달문의 공사 책임자, 즉 감동 김낙순에 대해서는 “병진년(1796년, 정조20년) 3월에 길주 목사에서 이곳으로 옮겨 와 9월까지 감동으로 175일 실제 일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화성성역의궤 18쪽).
◆ 팔달문, 이름을 기억해주는 리더십
정조는 “옛날 사람들은 작은 다리 하나를 건립했어도 오히려 돌에 새겨서 그 일을 기록하게 했다. 하물며 이번 성역은 일이 크고 소중함이 자별하니 공적을 기록하는 처사가 있어야 하겠다”라며 평민 이름까지도 성벽이나 <화성성역의궤>에 적어 놓았다(화성성역의궤 200쪽). 이름을 기록해주는 이런 리더십이야말로 애초 10년 계획의 성역을 33개월 만에 조기 달성할 수 있는 비결의 하나였다.
팔달문을 빠져나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에 올라 <화성성역의궤>를 펼쳐 읽었다. 책의 첫 편[首]에 나오는 화성전도(華城全圖)는 정조의 정치철학을 읽게 하는 청사진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俯瞰法)을 이용해 팔달산 턱 밑의 화성행궁이며, 그 위 서장대의 위용, 그리고 행궁 아래 남북으로 길게 흐르는 수원천[柳川]의 모습을 손에 잡힐 듯 그려냈다.
마치 드론(Dron)으로 촬영한 듯 생생하게 화성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이 그림은 자연과 인공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화성전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래쪽에 곶(串)처럼 돌출되어 나온 동장대 부분이다. 왜 정조는 장안문에서 아래로 동장대까지 성곽을 직선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왜 장안문으로부터 위로 화서문까지 민가를 가로질러 곧장 성을 쌓지 않았을까?
정조의 말 속에 답이 있다. 수원화성 건설을 설계하는 초기인 1794년 1월 15일 팔달산 정상에 오른 정조는 성터 형세를 두루 둘러보았다. 이 때 북쪽 마을, 즉 나중에 들어서게 될 장안문에서 화서문까지의 민가를 헐어야 한다는 신료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 헐어서 철거하다니. 그것이 과연 인화(人和)를 귀히 여기는 뜻인가.”
정조는 이렇게도 말했다. “이곳의 시내가 마침 버드내[柳川]이니 마땅히 성 모양도 버들잎 같아야 하지 않겠느냐? 북쪽 마을의 인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곳을 세 번 구부리고 또 세 번을 꺾어서 성을 쌓으면 마침내 버드내의 뜻도 담을 수 있을 것이다.”(화성성역의궤 194-195쪽).
◆ 정조가 말하는 ‘일 잘하는 순서’ : 규모 - 미리 경영 - 적격자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에서 내려다본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만 개의 꽃봉오리가 만개한 것을 화(華)라고 한다더니, 성곽을 둘러싼 수 만개 전등불빛이야말로 화성의 이름을 실감나게 했다. 정조는 영부사 채제공을 불러 일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일에서 규모를 먼저 정하는 것보다 앞선 것이 없고, 규모 정할 때는 미리 경영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며, 경영에는 적격자를 얻는 게 최고로 중요하다[凡事如先定規模 規模莫如預爲經紀 經紀又莫如得其人].” 따라서 채제공이 이 일의 총책임을 맡으면 그 경영과 규모가 잘 들어맞을 것이라는 것이었다(화성성역의궤 191쪽).
여기를 보면 어떤 일을 할 때 맨 처음 해야 할 것은 규모 정하기[先定規模], 즉 주략(籌略)이라 불렸던 청사진을 잘 그리는 것이다. 정조가 엄치욱에게 화성전도를 그리게 하고, 김홍도 등에게 한강배다리 설계도 등을 그려오게 한 것은 기본 설계를 잘 짜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으로, 미리 경영해 보는 것[預爲經紀]이 중요하다. 핵심이 되는 요소들을 미리 검토하는 일인데, 정조는 이를 위해서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갑을 토론[甲乙之論]을 거치라”고 말했다.
인력을 어떻게 동원할 것이며, 예산은 무엇으로 뒷받침할 것인가를 미리 충분히 찬반토론해서 문제가 될 만한 것을 충분히 짚고 넘어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규모를 하나로 정한 다음엔 헛된 주장[浮議]에 흔들림이 없으면 비로소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게 정조의 신념이었다(화성성역의궤 193쪽).
맨 마지막은 그 일에 적합한 인재를 얻어서[得其人] 맡기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일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기준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그에 따르면 물을 볼 때는 찰랑이는 부분들을 잘 봐야 하는데, 잔잔한 곳이 아니라 찰랑거리고 여울지는 곳을 봐야 시내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곤경에 처했을 때도 국가가 추진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면 믿고 맡길 만하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정조실록 즉위년/10/13).
아울러 그는 상벌을 분명히 해서 채제공이나 조심태처럼 성과를 낸 인재에게는 상을 주어 장기근속하게 하였고(총리대신 채제공 외 화성성역의궤 259쪽, 감동당상 조심태 외 170쪽), 의사소통 왜곡자(164쪽), 공문서 왜곡자(207쪽), 그리고 의궤청 기록 누락자(221쪽) 등에게는 벌을 내렸다.
◆ ‘아름다운 것이 강하다’는 말의 참 의미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수원화성의 꽃인 화홍문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밤이라 수원의 가을 팔경의 첫 번째로 꼽히는 화홍문의 장쾌한 물보라를 볼 수는 없었지만, 방화수류정에 앉아 있으니 “아름다운 것이 진정 강한 것”이라는 정조의 말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정조는 성이 튼튼하면 되었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느냐는 반대자들을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겉모양만 아름답게 꾸미고 견고하게 쌓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옳지 않지만,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徒爲觀瞻之美 而不念堅緻之方 固不可 而觀瞻之美 亦有助於禦敵](정조실록 17/12/08).
‘웅장하고 화려해야 위엄이 있다[非壯麗 無以重威]’는 말은 수원화성 건설의 핵심 철학이다. 정조와 채제공 등은 수원화성을 쌓을 때 ‘꼭 필요한 것만 잘’ 만들게 했다. 성은 유사시 목숨을 걸고 싸우기 위한 군사용 건축이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잘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체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만 설치했다. 나중에 수원유수 이만수가 언급했듯이, 정조는 “용마루·기둥·섬돌·지도리 등을 견고하면서도 단순하게[堅固朴素] 만드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순조실록 1/2/10). 생존에 장애가 될 일체의 가식이나 과다함을 제거하여 질박(質朴)한 아름다움만 남긴 것이다.
‘견고박소(堅固朴素)’는 흥미롭게도 스티브 잡스와 함께 오랫동안 광고와 마케팅을 이끌었던 켄 시걸(K. Segall)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조직이든 제품 디자인이든 복잡하게 만드려는 인간의 본능에 맞서 ‘미친듯이 심플(insanely simple)’하게 단순화하는 데 사력을 다했기 때문에 애플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단순하기[朴素] 때문에 친근하고, 친근하기 때문에 시간의 도전을 이겨내며[堅固] 오래도록 사랑받는다는, 그래서 꼭 필요한 것만 잘 만들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달으며, 창룡문을 빠져나왔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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