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호남(湖南)지방의 호(湖)가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저수지 이름이 왜 호(湖·호수)나 지(池·못)가 아니고 제(堤·둑)일까. 호서(湖西)지방의 기준점이 제천 의림지(義林池)인 걸 감안하면 궁금증이 커진다. 이름에 얽힌 유래를 보자. 하나는 벽골이 백제 때 김제의 지명인 볏골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라는 설이다. 다른 설은 개축 과정과 관련이 있다. 둑의 북쪽에 있는 조선시대 중수비에 공사 과정이 적혀 있다.
당시 수리공사에 1만여명이 동원됐는데 툭하면 바다의 조수가 밀려와 공사를 망쳐 놓곤 했다. 감독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벽골(푸른 뼈)을 흙에 섞어 쌓으라고 해서 푸른 기가 도는 말뼈를 갈아 넣어 공사를 무사히 마친 연고로 벽골제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때 일꾼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짚신을 버린 신털뫼(草鞋山)와 일꾼 숫자를 500명씩을 되로 되듯이 세었다는 되배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벽골제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여기에서 촉발됐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가 대형 저수지라고 배운 벽골제의 원래 기능은 바닷물을 막는 방조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사 중 조수 때문에 낭패를 겪은 사례와 둑이 일직선인 점, 옛 지도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구한말까지 거의 버려졌던 이곳이 일제의 대규모 농경자본과 간척 덕분에 곡창지대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그전까지는 제방 서쪽이 갯벌이었다는 것이다(정규재뉴스(jkjtv.hankyung.com)의 ‘이영훈 극강’ 참조).
이에 대해 허수열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수지로서의 벽골제를 옹호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등 많은 문헌에 저수지라고 기록된 역사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절충론도 있다. 《전략전술의 한국사》를 쓴 이상훈 교수는 “축조 당시에는 방조제 성격이 강했으나 점차 저수지로 변모했다”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호남·호서·기호 지방의 구분도 특정 호수가 아니라 의림지가 있는 금강 상류와 벽골제가 있는 금강 하류를 기준으로 삼는 게 옳은 게 아닐까 싶다. 금강은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해서 호강(湖江)으로도 불리니 더욱 그렇다.
고두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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