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설왕설래] 천안문

바람아님 2016. 6. 6. 00:12
세계일보 2016.06.05. 18:01

천안문(天安門).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톈안먼’이라고 쓴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쓰이는 중국 인명·지명을 모두 현지 발음으로 표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써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한족 중국인에게 “톈안먼”이라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에?”라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는 뜻이다. 사성(四聲)도 문제지만 ‘티앤(天)’을 ‘톈’으로 단음 처리하니 빚어지는 일이다. 베이징대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서는 왜 중국인도 알아듣지 못하는 국적 불명의 말을 만들어 쓰느냐.” 한자를 배우지 않고, 톈안먼으로만 쓴 글을 읽은 어린 세대는 역사 속의 천안문을 알기나 할까. ‘역사 단절의 화(禍)’는 또 얼마나 클까.

천안문은 명 영락제 때 처음 세워졌다. 몽골족 쿠빌라이가 세운 원의 황궁을 불사르고 지금의 위치에 자금성을 지었다. 1420년 완공 때 이름은 승천문(承天門)이었다. 그 문은 명말 이자성 반란군에 불타고, 청이 들어선 뒤 1644년 다시 세워졌다. 천안문은 이때 지어진 이름이다. 야인(野人)으로 불린 만주 여진족. 그 이름에 ‘천자의 제국’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까.


그 문 아래에서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다. 2차 아편전쟁 4년 뒤인 1860년, 그곳에 영불 연합군이 들이닥쳤다. 청 함풍제는 청더(承德)의 피서산장으로 피신했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의 열하(熱河)는 피서산장에 있는 작은 개울이다. 베이징의 원명원 문화재는 그때 약탈당했다.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고 한다. 점령? 곧바로 철수하지 않았던가. 왜 그랬을까. 거대한 천안문. 그 기세에 눌려 “오래 머물면 재앙이 닥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는 1919년 5·4운동이 벌어지고, 1976년 4월 5일 사인방(四人幇)의 종말과 개혁·개방의 시작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천안문 문루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세계인민대단결 만세”라는 구호가 내걸려 있다. 현판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27년 전 그곳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은 숨을 죽이고 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1시 40분, 인민해방군이 들이닥쳤다. 50일 넘도록 그곳에서 정치개혁을 외친 중국의 대학생들. 영국 BBC방송은 당시 7000여명이 희생됐다고 전했다.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는 300여명이다. ‘톈안먼 사건’, ‘톈안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 베이징은 올해도 조용하다. 홍콩만 요란하다. 4일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는 12만명이 모였다.


그때 그 열망은 식어버린 걸까. “역사는 바뀐다”고 했던가. 도전과 응전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G2 중국’의 경제 성공은 그 열망을 잠재울까.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