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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의 시간여행] [33] 60년대 비키니 상륙.. '해괴망측한 꼴' "노출 여성은 娼婦 근성 있다" 비난도

바람아님 2016. 8. 24. 23:17
조선일보 2016.08.24. 03:10

"여자들이 알몸에 겨우 그곳만을 형식적으로 약간 가렸다." 1966년 여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해괴망측한 꼴'의 여성들이 나타났다. 비키니의 본격 상륙이다. 프랑스 수영복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의 손에서 탄생한 게 l946년이니 20년 걸렸다. 초창기 국내의 비키니란 오늘에 비하면 무척 '얌전'했다. 상의는 상반신을 꽤 넓게 가렸고 하의는 오늘의 핫팬츠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벌건 대낮에 젊은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배꼽과 허벅지를 드러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 컸던 듯하다. 

신문에는 '옛날 할아버지가 봤으면 기절초풍했을 것'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노출증'이라는 식의 비키니 때리기가 이어졌다. 여자들이 정신 나갔다고 여겼는지 1972년 두 신문은 약속이나 한 듯 정신과 의사에게 비키니 유행을 진단하는 글을 받아 실었다. 대학병원 정신과 과장인 의학박사는 기고에서 '욕구불만을 느끼며 사는 여성들이 차원 낮은 만족이라도 얻으려고 자기 몸을 노출하는 것' '여자들의 노출은 남자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이라며 비키니 입는 여성들을 '비정상'으로 깎아내렸다. 

어느 유명 작가는 한술 더 떴다. "(벗은 몸을 과시하는) 미녀들의 마음에 창부(娼婦)적인 근성이 있다고 하면 모독이 될까"라고 아슬아슬한 수위로 글을 썼다. 오늘 같으면 몰매 맞을 표현들이다. 비키니와 미니스커트가 한창 유행하던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한국의 노출 패션이 북측 인사들 눈까지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9월 13일 워커힐에서 비키니 차림 댄서들의 무용을 관람하던 북한 기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제국주의자들이 버려놨구먼!"(조선일보 1972년 9월 14일자)

노출 패션을 방치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정부는 10월 유신 직후인 1973년 초 경범죄처벌법을 더 엄하게 개정했다. 노출을 금하는 치부를 '배꼽, 젖꼭지, 둔부'로 규정하자 배꼽을 드러내는 비키니 애용자들이 불안해했다. 그러나 같은 배꼽 노출이라도 해수욕장에서는 예외적으로 묵인하고, 그 밖의 공공장소에서는 금지됐다. 실제로 1975년 8월 소양댐에서 비키니를 입고 활보하던 30대 여성이 경찰의 단속을 받기도 했다.


탄생 70년을 맞은 비키니가 이제 수명을 다해 가는 것일까. 올해 피서지에서 비키니는 퇴조하고, 몸을 더 많이 가리는 물놀이 옷인 래시가드(rash guard)가 유행의 첨단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여성들이 바닷가에서 피부 노출을 줄이게 된 이유가 궁금해진다. 여성들이 보수적이 됐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부끄러워서 피부를 더 가리는 게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싫은 군살을 가리려고 래시가드를 입는다고 한다.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려는 동기도 빼놓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지난 세기에 비해 풍속과 의식이 경천동지할 만큼 개방적으로 변한 오늘날, 비키니 정도의 세미 누드는 진부해져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여름이면 가슴을 노출한 여성들로 메워졌던 프랑스 칸 해변에서 2009년쯤부터 토플리스 미녀들이 거의 자취를 감춘 일이 떠오른다. 당시 프랑스 언론의 진단은 이랬다. "처음엔 가슴 노출이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녀들은 세상의 이목을 끌며 페미니즘을 주창했다. 이제 더 이상 토플리스는 충격을 주지도 못하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도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