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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일기] (19) 어릿광대의 경쾌한 어리석음

바람아님 2016. 11. 12. 23:20
[중앙일보] 입력 2016.11.12 00:50

공동묘지 종종 거닐며 영적 수련, 허상 좇는 어리석음 떨쳐내
나를 늘 매혹시키고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책이 있다. 바로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愚神禮讚)』이다. 15세기가 낳은 위대한 인문학자 에라스뮈스는 우리의 비루한 일상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권한다. 삶을 너무 심각하게 저울질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질병임을 깨치라고 호소한다.

나는 그의 유머가 좋다. 예컨대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종을 퍼뜨리는 기관이 무엇인지 묻는다. 두뇌도 다리도 심장도 손도 아니라는 것이다. 킥킥거리며 웃지 않고서는 입에 담기도 쑥스러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유쾌한 철학자는 말한다. 우리에게 한줌 어리석음조차 없다면 이 삶이 얼마나 고달프겠냐고. 솔직히 한번 말해 보잔다. 결혼을 가능하게 하고, 왜냐는 질문 없이 세상사에 뛰어들며,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약간의 어리석음 없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냐고.

하긴 언제든 모든 걸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다는 점, 깐깐한 에고를 마치 낡은 옷처럼 훌렁 벗어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보나 성인(聖人)이나 도긴개긴 맛이 간 존재라는 우스갯소리도 없진 않다. 우리를 건강한 삶으로 이끄는 동력은 치밀하고 차가운 계산이 아니라 손익을 따지지 않는 생명력, 그 경쾌함에서 오지 않는가.

물론 어리석음이 지나치면 무분별과 맹목성이 기승을 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폐단은 생활의 감초 역할을 해주는 경쾌한 어리석음과는 무관하다. 어릿광대의 장난기와도 같은 어리석음은 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진취성, 오만과 자존심의 무거운 짐을 가뿐히 벗어 던지는 대범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구체적으로 어릿광대의 장난기란 사회적 지위, 역할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발상을 가능케 해준다. 구두 속 돌멩이와도 같은 분노와 집착, 슬픔의 앙금들을 마음에서 몰아내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게 해준다. 그것은 아둔하고 몽매한 낙천성이 아니다. 삶에 대한 뚜렷한 신뢰를 요구하는 무엇이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만 움직이기를 바라는 욕망, 그 버거운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는 용기다.

얼마 전 나는 친구와 함께 레만 호숫가의 어느 아담한 공동묘지를 산책했다. 거기 한 묘비명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법학박사 여기 잠들다. 허무로다, 허무, 모두가 허무로다!’ 사실 공동묘지를 거닐다 보면 훌륭한 영적 수련을 한다는 느낌에 젖을 때가 종종 있다. 그때 공동묘지는 어릿광대의 지혜를 배우는 산책코스다.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세상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 이 몸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나 바로 그 존재의 덧없음이 오히려 삶의 환희와 감사를 부른다는 점.

어리석음을 예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계적인 삶과 결별하겠다는 선언이다. 결코 로봇처럼 살아가지 않으리라는 자각 말이다. 그런 면에서 어릿광대의 어리석음은 성인이나 현자의 우매함을 닮은 게 맞다. 그것은 계산 없이 사랑하고, 빼앗기보다는 내어주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에너지다.

당연히 세상에는 진부한 어리석음도 존재한다. 헛된 것에 매달리는 미련, 마음속 보물은 돌아보지 않고 허상을 좇아 뜬구름의 언덕만을 넘보게 만드는 잔머리가 그것이다.

정녕 어떤 어리석음이 우리의 삶을 살 만하게 만들겠는가?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