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0월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근대적 자주독립국임을 나라 안팎에 선언한다.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 부근의 환구단은 제천 의례를 거행하는 곳으로, 조선 초기에 없어졌으나 고종이 부활시켰다. 앞서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는 모두 고종의 황제 즉위를 요청했고 한양 주민의 간청도 잇따랐다. 고종과 국민의 의지가 결합해 대한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고종의 의지는 을미사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1895년 8월20일 일본인이 시해한 뒤 암매장한 명성황후의 유해는 10월10일에야 입관돼 경복궁 태원전에 안치된다. 고종은 수시로 이곳을 찾아 복수와 독립 의지를 다진다. 그가 1896년 2월11일 궁녀의 가마를 타고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아관파천)도 복수와 독립을 위해서다. 명성황후의 유골은 1896년 4월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지고, 고종도 1897년 2월20일 경운궁에 자리를 잡는다.
대한제국은 다양한 개혁을 추진한다.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 국제가 공포되고 행정체계 정비와 재정 일원화, 양전사업 등을 통해 자주적 근대화가 시도된다. 고종은 자신의 개혁을 구본신참(舊本新參),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고 했다. 대한제국은 입헌군주제를 요구한 개화파를 탄압하고 전제군주제를 택한 한계를 갖는다. 가장 큰 장벽은 외세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즉각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다. 대한제국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 때까지 유지되지만 이미 독립국은 아니었다.
서울시가 최근 환구단과 덕수궁, 옛 러시아 공사관 등을 연결해 조성한 ‘대한제국의 길’(2.6㎞)을 걸어보면 옛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이 일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시위에서도 보듯이 고비 때마다 다중의 의지가 분출된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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