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그칠 지(止)의 이미지는 정적(靜的)이나 쓰임새는 동적이다. 止는 발 모양을 본뜬 글자다. 止를 두 개 겹치면 걸음 보(步)가 된다. 좌우 발이 앞뒤로 있어 걷는 것이다. 보행로 확장과 연결에 관심을 쏟았던 승효상 전 서울시 총괄건축가는 “머물기 위해 걸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걷고 싶은 도시가 머물고 싶은 도시다. 변증법의 핵심어인 지양(止揚)에서 ‘지’도 정체 상태가 아닌, 모순·대립 해소를 위한 전략적 멈춤이다.
기업의 기(企)는 사람(人)이 머무르는(止) 형상이다. 직원이 오래 일할 수 있다면 좋은 기업이다. 우샤오후이(吳小暉) 중국 안방보험 회장 같은 이는 “사람이 떠나면 일이 멈추게 된다”며 인재경영을 표방한다. 시류에 휩쓸려 중심을 잡기 힘들 때 한번(一) 호흡을 멈추고(止) 바라보면 바른(正) 생각에 이를 수 있다. 불교 수행법의 하나인 지관(止觀)의 ‘지’ 역시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 집중하는 것이다. 군주를 상징하는 어(御)의 가운데 부분이 말을 뜻하는 오(午)에 止를 붙인 형태인 것도 흥미롭다. 누군가는 한자 한 글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있다고 했다.
일찍이 멈춤은 지식인의 처신을 경계하는 의미로 쓰였다. 노자 도덕경 44장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내용이 있다. 고구려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 중 ‘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知足願云止)고 한 구절은 그 변용이다. 지지(知止)는 멈출 곳, 멈출 때를 아는 것이다. 이미 허물이 있어도 도중에 멈출 줄 알면 최악은 면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자신의 거처를 ‘지지헌(止止軒)’이라 짓고는 그 뜻풀이를 이렇게 달았다. ‘지지란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멈출(머물) 곳이 아닌데도 멈춰 있으면 그 멈춤은 멈출 곳에 멈춘 것이 아니다.(夫所謂止止者, 能知其所止而止者也. 非其所止而止, 其止也非止止也.)’ 국문학자 정민(한양대) 교수가 ‘죽비소리’(2005)에 인용한 글이다. 지지(知止)가 지혜라면, 지지(止止)는 실행이다.
멈춰야 할 지점도 타이밍도 흘려보낸 1인의 욕심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멈춰 섰다. 민심 역주행을 그칠 기미도 없다. 이규보의 글에 붙인 정 교수 촌평이 자못 신랄하다.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주저물러 앉아 있으면, 솎아져서 뽑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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