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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명랑笑說] 문체에 살고, 문체에 죽고

바람아님 2016. 12. 25. 15:36

(조선일보 2016.12.24 남정욱 작가)


글 써서 먹고산 지 25년…가장 관심 있는 건 스타일 

최인훈의 문체와 최인호의 내러티브에 반해 

글을 쓴다는 건 아름다움을 배워가는 과정


[Why] [남정욱의 명랑笑說] 문체에 살고, 문체에 죽고내년이면 글 써서 먹고산 지 25년이 된다. 

물론 내내 글만 썼던 것은 아니고 틈틈이 회사도 다녔다. 

그러나 회사에서 했던 일도 결국 글 쓰는 업무였고 불량한 태도에도 

안 잘리고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앞뒤 문맥 맞게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의 절반 동안 신문에 글을 썼다. 

순서가 특이해서, 글쓰기를 좋아해서 실력이 좋아진 끝에 신문에 글을 쓴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어서 일단 쓰고 나중에 쓰는 법을 

배웠다. 

홍대식으로 말하면 "밴드부터 만들어. 기타는 천천히 배우고"가 되겠다. 

신문에 글을 처음 쓴 것은 '도어즈'라는 영화 홍보를 할 때다. 

유명 영화배우의 감상문을 대신 쓴 건데 다른 사람 이름으로 나왔지만 

지면에 내 글이 실린 게 신기해서 읽고 읽고 또 읽고 밤에 자다 벌떡 일어나서 

또 읽었다.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지 얼마 후에는 청룽(成龍)이라는 

액션 배우의 라이프 스토리를 한 달여 연재했다. 이번에는 내 이름이었다. 

원고료는 없었다. 달랄 생각도 안 했지만 줄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스포츠 신문이었고 당시에는 풍토가 그랬다). 글은 누가 고쳐줘야 는다. 

그래서 그때 글을 첨삭해준 담당 기자들이 소생의 글쓰기 선생님들이다.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해주면 아닌 척하면서도 다들 좋아한다. 

당신이 좋은 선생이었는지 최악이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세상에는 덮고 가야 할 것들이 있다.


내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스타일이었다. 문체(文體)라고 해도 되겠다. 

서정인의 문체를 좋아했고 수백 번 반복해서 읽었다. 줄거리는 기억이 안 나지만 몇몇 문장은 지금도 생생하다. 

최인훈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한국어로 쓴 것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런 보석을 놔두고 '광장' 같은 걸 높게 치는 

우리는 정말 독서 풍토가 특이한 국민이다. 

사실 글 쓰는 사람에게 책 내용이나 정보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식과 정보는 널려 있다. 책을 볼 때 나는 오로지 문체만 본다. 문체가 신선하면 계속 읽고 '구리거나' 없으면 바로 덮는다. 

문체가 없다는 건 지문이 없는 인간처럼 이상한 말인데 그런 고민 없이 글을 쓰는 작가들을 보면 많이 놀랍다. 

문체에서 예외인 경우가 하나 있는데 최인호다. 명사와 동사로만 정말 가난하게 쓴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어이없는 문장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내러티브(스토리)가 워낙 빠르다 보니 문체 같은 걸 따질 틈이 없다.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바쁘다. 

잘 썼다는 최근 한국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이런 생각을 한다. 

초창기 최인호는 정말 잘 썼구나.


문체에 매달린 보람이 있었다. 누군가 내 글을 보고 소생체(小生體)라고 불러 줬을 때다. 

기뻤지만 체(體)에 대한 설명은 별로였다. 실실 웃으면서 남을 빈정대는 문체. 

그렇다면 거기에 좀 더 따뜻함을 더하면 어떻겠냐 물었더니 그러면 정신분열 문체가 된다고 한다. 

아, 어렵다. 가끔가다 소생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나도 잘 모른다. 

그저 '나는'이라고 하면 너무 나대는 것 같고 '저는'이라고 하면 너무 저자세인 것 같아 그냥 쓴 거다. 

25년, 문체를 다듬으며 살았다. 별로 늘지는 않았으되 깨달은 것은 있다. 

인생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조금씩 아름다움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게시자 추가 자료.


크리스마스 캐럴 / 가면고(假面考)
(앙떼르나쇼날 블로그 - 독서일기  2012.09.07. )


크리스마스 캐럴 / 假面考 (최인훈 전집의 6권)

최인훈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9/ 339 p

813.6-ㅊ622ㅋ 3 |[정독]어문학족보실(2동1층)/

[강서]3층 어문학실[관심도서등록] 


최인훈 전집의 6권이다. 15권까지 나와 있다. 갈 길이 멀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딘가에 연재한 것 같다.

 '나'와 옥이와 아버지가 반복해서 등장할 뿐, 각 장은 독립적이다. 

서양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세태를 풍자하기도 하고, 남과 북 체제의 

선전방식을 비판하기도 하고, 4.19 혁명으로부터 5.16 쿠데타까지의 현대사에 대해 

논평하기도 한다. 등장인물과 공간적 배경 등 몇 가지 조건을 고정시킨 채, 

여러 주제를 다루는 형식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닮았다.

 

「가면고(假面考)」 는 우선 제목의 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흔히 쓰는 말이 아닌 만큼 한자를 병기하면 한결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약 130쪽짜리 짧은 소설인데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독백이 많고 상징이 복잡한 데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스토리라서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긴 독백 사이사이에 이유정이 등장하던 『회색인』과 닮았다. 

이유정도 미라처럼 화가였다. 최인훈에게 여류화가는 어떤 상징성을 띄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