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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이야기] (21) 술꾼과 바람둥이

바람아님 2016. 12. 25. 23:37
[중앙일보] 입력 2016.12.24 00:22

술·쾌락에 빠졌다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그들의 고뇌를 살피자
우리 동네 광장에선 심심치 않게 벼룩시장이 열린다. 많은 사람이 한 푼이라도 건지기 위해 온갖 잡동사니들을 싸들고 나와 늘어놓는다. 딸 빅토린은 친구들과 함께 그 북적대는 사람과 물건들 사이를 용케 헤집고 다닌다.

아니나 다를까, 얼큰하게 취한 술꾼들도 삼삼오오 모여 모처럼 기분을 내는 중이다. 그중 한 명이 문득 나를 알아보고는 환한 웃음으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이가 거의 없는 입으로 그가 털어놓는 신세타령은 의외로 심각하다. 파산한 지 오래인 그는 현재 폐암을 앓는 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제일 원하는 게 무어냐는 나의 질문에 서슴없이 대답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사랑하면서, 엉망진창인 이 세상에 작은 보탬이 되고 싶다고. 어차피 한번 가는 인생, 죽음은 두려울 것이 없다고도 한다. 다만 새해 첫날을 또다시 길거리에서 맞게 될까봐 그게 걱정일 뿐. 담배꽁초와 술병을 각각 손에 쥔 그는 모든 걸 가진 얼굴로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벼룩시장에서 마주친 그 다음 말동무는 멀끔한 생김새의 청년이다.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섹스중독자의 고백이나 다름없다. 어느 한 인연만을 고집하지 않고 되는 대로 쾌락의 편력을 이어 가는 그의 일상은 흡사 집착 없는 삶의 교본 같기도 하다. 상대가 받아주면 고맙지만 무안하게 면박당한들 아쉬울 이유가 뭐겠느냐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라는 행성엔 70억 명이 살고 있고 그 삶은 예외 없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간다고. 

그러니 사랑이 거부하면 다른 사랑 찾아 가던 길을 가면 그뿐. 문제를 복잡하게 키우는 것은 질색이라고. 쾌락에 빠졌을지언정 욕심 없어 보이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왠지 과격한 돈 후안 대신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성자(聖者)가 떠올랐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존재의 더없이 나약한 처지로 전락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좌절의 수렁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눈앞의 고생을 피하기 위해 이런저런 거짓 해결책을 꾸려보지만, 술이든 쾌락이든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끌 뿐이다. 그런 우리의 나약함을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거기서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을, 뿌리 깊은 고뇌를 살피는 것은 어떤가.

벼룩시장에서 만난 나의 두 친구는 분명 지겨우리만치 고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 처지엔 변화가 없어 보인다. 둘 다 마음속을 점거한 공허감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발버둥치나,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각자 내면의 공허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쾌락의 거짓 위안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서 어떻게 존재의 불안을 살아낼 것인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빅토린과 친구들은 잡동사니들로 가득 찬 호주머니를 일제히 비워낸다. 하루 종일 벼룩시장에서 건진 보물들을 한데 늘어놓고 자기들끼리 품평회를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토록 신나서 긁어 모은 물건들을 막상 찬찬히 들여다보니 하나같이 별로인 모양이다. 역시 진정한 보물은 언제나 다른 어딘가에 있다.

<필자가 최근 유럽으로 이주했기에 ‘서울 일기’를 ‘서울 이야기’로 바꿔 연재합니다.>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