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쾌락에 빠졌다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그들의 고뇌를 살피자
아니나 다를까, 얼큰하게 취한 술꾼들도 삼삼오오 모여 모처럼 기분을 내는 중이다. 그중 한 명이 문득 나를 알아보고는 환한 웃음으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이가 거의 없는 입으로 그가 털어놓는 신세타령은 의외로 심각하다. 파산한 지 오래인 그는 현재 폐암을 앓는 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제일 원하는 게 무어냐는 나의 질문에 서슴없이 대답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사랑하면서, 엉망진창인 이 세상에 작은 보탬이 되고 싶다고. 어차피 한번 가는 인생, 죽음은 두려울 것이 없다고도 한다. 다만 새해 첫날을 또다시 길거리에서 맞게 될까봐 그게 걱정일 뿐. 담배꽁초와 술병을 각각 손에 쥔 그는 모든 걸 가진 얼굴로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벼룩시장에서 마주친 그 다음 말동무는 멀끔한 생김새의 청년이다.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섹스중독자의 고백이나 다름없다. 어느 한 인연만을 고집하지 않고 되는 대로 쾌락의 편력을 이어 가는 그의 일상은 흡사 집착 없는 삶의 교본 같기도 하다. 상대가 받아주면 고맙지만 무안하게 면박당한들 아쉬울 이유가 뭐겠느냐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라는 행성엔 70억 명이 살고 있고 그 삶은 예외 없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