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1.11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추사의 글씨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글귀는 예서로 쓴
"작은 창에 볕이 많아,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한다(小窗多明, 使我久坐)"는 구절이다.
작은 들창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그는 방 안에서 미동(微動) 없이 앉아 있다.
명창정궤(明窓淨几). 창문은 햇살로 환하고, 책상 위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이 네 글자는 선비의 공부방을 묘사하는 최상의 찬사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명창(明 )'에서
"밝은 창 정갈한 책상에 앉아 향을 사르니, 한가한 중 취미가 거나함을 깨닫네(明䆫淨几坐焚香, 頗覺閑中趣味長)"라 했다.
오장(吳長·1565~ 1617)은 '서실소기(書室小記)'에서
"고인의 책이 수십 질 있어서 밝은 창 깨끗한 책상에서 혹 손길 따라 뽑아서 보고,
혹 무릎을 꿇고 소리 내서 읽으면,
문득 생각이 전일하고 간절해지는 것을 느낀다
(有古人書數十帙, 明窻靜几, 或隨手抽檢, 或斂膝誦讀, 頗覺意思專切)"고 썼다.
유원지(柳元之·1598~1674)의 '병을 앓은 뒤(病起)'란 시도 있다.
"따뜻한 방 병이 나아 뜻이 조금 맑기에, 시원한 곳 찾아 앉자 기운 절로 편안하다.
인간 세상 으뜸가는 쾌활한 일이라면, 밝은 창 깨끗한 책상에서 시경을 읽는 걸세
(溫房病起意差淸, 坐趁輕凉氣自平. 多少人間快活事, 明䆫靜几讀詩經)."
오랜 병치레 끝에 모처럼 책상을 깨끗이 닦고 볕 드는 창에 앉아 '시경'을 소리 내어 읽으니,
세상에 아무 부러울 것이 없더라는 얘기다.
한국고전번역원 DB에서 '명창정궤'를 쳐보니 무려 171회의 용례가 나온다.
여기에 이어진 아래 구절 중에 몇 가지를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옛 책을 소리 내 읽는다(諷誦古書)", "손을 모두고 무릎을 여민다(拱手斂膝)",
"조촐해서 잡스러움이 없다(蕭然無雜)", "종일 단정히 앉아 있는다(端坐終日)",
"한 심지의 향을 사른다(焚一炷香)", "고요히 시서와 마주한다(靜對詩書)",
"오도카니 단정히 앉는다(兀然端坐)", "도서가 벽에 가득하다(圖書滿壁)."
볕 잘 드는 창 아래 앉아 책상을 말끔히 치우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한 해의 구상으로 새해를 시작하면 어떨까?
우리는 너무 말이 많고 심히 부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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