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강천석 칼럼] '정치가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바람아님 2017. 4. 29. 20:06

(조선일보 2017.04.28 강천석 논설고문)


세종시, 대통령과 한국 정치 실패 역사 담고 있어 

문재인, 노무현의 두 얼굴 중 어느 길 택할까


강천석 논설고문세종시를 보면 한국 정치가 보인다. 

200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잉태(孕胎)된 세종시의 반평생(半平生) 안에는 한국 정치의 

과거·현재·미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산모(産母)는 노무현 대통령이지만 후임인 이명박·박근혜 대통령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세종시 역사에는 한국 정치가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과 탈출을 위해 찾아야 할 

출구(出口)의 단서가 함께 녹아있다.


한국 대통령은 어떤 자리인가. 정치가와 정치인이 나누어지는 경계선(境界線)은 어디인가. 

정치인은 어떤 계기를 통해 정치가로 새로 태어날 수 있는가. 정당정치·여론정치·민주주의의 한계(限界)는 무엇인가.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 이상의 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의 본래 뜻은 무엇인가. 

한국 국민은 과연 선진(先進) 국민인가. 

한국 정치는 어떻게 실패의 족쇄(足鎖)를 깨고 성공 모델을 새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세종시 건설 총 사업비는 22조5000억원이다. 

또 하나의 국가적 토목공사였던 이명박 정부 4대강 사업의 총 사업비는 22조2000억원이다. 

세종시 건설 목표는 수도권 인구 집중을 억제하고 지방 균형 발전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전국 인구의 49%가 수도권에 몰려 있고 수도권과 지방 간 경제·교육·의료·문화 격차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이 목표는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수도 이전이 처음 거론된 2002년 이후 15년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목표는 얼마만큼 달성됐을까.


노무현 정부 주체 세력들은 '수도권→지방' 이주(移住) 인구가 '지방→수도권' 이주 인구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을 

성과로 들고 있다. 

이 성과는 숫자로 제시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2016년 863명이었다. 2015년 3만2364명, 2014년 2만1111명, 2013년 4384명이다. 

이 통계는 연도(年度)가 중요하다. 

행정부 부처 가운데 총리실을 비롯 3분의 2에 해당하는 부처가 세종시로 옮겨갔다. 62개 공공기관이 청사를 이전했다. 

수도권 인구 순감(純減) 통계는 국토 균형 발전의 성과가 아니라 청사 이전에 따른 공무원·공공기관 직원 강제 이주의 

결과다. 청사 이전이 대충 마무리되자 이주 숫자가 곤두박질친 사실이 증명한다.


여기에는 또 다른 눈속임이 있다. 

노무현 정부는 세종시 건설과 병행(竝行)해 전국 곳곳에 혁신 도시를 만들어 115개 공공기관 청사를 새로 짓거나 옮겼다. 

직원들 강제 이주가 뒤따랐다. 청사 이전 경비는 몇 조(兆)에서 10조원대를 넘나들 것이다. 

결국 세종시 건설은 수도권 인구 집중 억제라는 당초 의도했던 효과를 전혀 발휘하지 못한 셈이다.


세종시 건설은 정책 입안(立案) 당시 예상했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부작용과 역(逆)효과를 낳았다. 

요즘 세종시 부처 과장급 이상 공무원의 절반 가까이가 주(週) 3~4회 서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다. 

공무원 조직은 과장 중심이다. 축구에서 볼을 전방(前方)에 뿌려주는 미드필더에 해당한다. 

후배들 견해를 모아 정책 문서 작성의 핵심 역할을 하고 조직 상하 간 의사소통의 다리 구실을 한다. 

세종시에서 과장 얼굴을 대하기 힘들다는 말은 공무원 조직이 휴면(休眠) 상태라는 이야기다. 

장관·차관·국실장도 국회 접촉을 위해 서울에 상주(常駐)하다시피 한다.

세종시 공무원 전체가 민간(民間) 주도로 흐르는 세계 정보 흐름에서 소외돼 있다. 낙후(落後)될 수밖에 없다. 

지난 몇 년 정부가 내놓은 정책마다 타이밍을 놓치거나 한물간 내용이 많은 것도 세종시의 고립된 환경과 무관(無關)하지 않다.


노무현 후보는 훗날 본인 말처럼 수도 이전 공약으로 선거에서 '재미를 봤다.' 그걸 나무랄 수는 없다. 

이명박 후보·박근혜 후보도 같은 길을 갔다. 

대통령에 당선된 순간이 '정치인'에서 '정치가'로 도약(跳躍)할 결정적 계기였다. 

세 대통령 모두 이 기회를 흘려보내고 나라와 국민 특히 다음 세대들에게 어마어마한 부채를 떠안겼다. 

어느 후보 어느 정당도 수도 이전·수도 분할(分割) 문제와 정면 대결하지 못했다. 

이것이 정당정치·여론정치·민주주의의 약점(弱點)이자 한계다. 

그런 후보, 그런 정당에 표를 몰아준 국민은 현명했을까. 

선진 국가를 향한 여러 세대(世代)의 꿈을 성취할 능력과 자격을 갖췄을까.


문재인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눈에 띄는 격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문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상속자(相續者)다. 

노 대통령은 수도 이전 문제 앞에서 '정치인 노무현'으로 주저앉고 말았지만, 

한미 FTA·제주 해군 기지 건설에선 '정치가 노무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문 후보는 핵 위기·사드 배치·한미 동맹 문제 앞에서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수도 이전 공약'과 닮은꼴이 '정부 주도 일자리 70만개 공약'이다. 

문 후보가 '정치인 노무현'의 상속자인지 '정치가 노무현'의 계승자인지가 가려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문 후보에게도 국민에게도 세월처럼 긴 며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