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23>양화진(楊花津)

바람아님 2013. 9. 16. 09:05

(출처-동아일보 2002-09-12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5 외국인묘지 부근 절두산 일대의 옛 모습이다.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르지만 그 시절에는 잠두봉(蠶頭峯) 또는 용두봉(龍頭峯)이라 했다. 강가에 절벽을 이루며 솟구쳐나온 산봉우리가 누에머리나 용머리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절두는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고종 3년(1866) 병인 1월에 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이 곳에서 처형하면서 절두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일대가 천주교 성지가 됐지만 본래는 양화나루가 들어서 있어 서울과 양천 사이에 물길을 이어주던 곳이다.

이곳에 나루가 설치된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김포 인천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자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므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조선 태조 3년(1394) 이후에는 이 나루의 효용이 매우 커졌으리라 생각된다.

세종 32년(1450)에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한림학사 예겸(倪謙)이 한강에서 뱃놀이 대접을 받던 중 이곳 잠두봉 양화나루에 들러 이런 시를 남겨놓았다.


‘한강의 묵은(오래된) 나루 양화라 하네, 좋은 경치 찾아 정자 지으니곁에는 물가,

 떠나가 닿는 돛단배 아득히 멀고, 기러기 울음소리 모래밭에서 인다.’

이 시로 보면 세종 때에 이미 잠두봉 아래에 양화나루가 들어서 있음을알 수 있다. 이 즈음에 벌써 경치 좋은 이 잠두봉 일대는 태종의 제7왕자인 온녕군 정(溫寧君 程·1397∼1453)이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겸이 올라가 쉬었던 정자도 온녕군 집 정자였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온녕군의 손자인 무풍정 이총(茂豊正 李총·?∼1504)이 이곳 잠두봉 아래에 별장을 짓고 은거했다거나 스스로 서호주인(西湖主人) 또는 구로주인(鷗鷺主人)이라 일컬으며 고기잡이배를 손수 젓고 다녔다는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총은 점필재 김종직(F畢齋 金宗直·1431∼1492)의 문인(門人)으로 연산군 무오사화(1498) 때 화를 입은 김일손(金馹孫·1464∼1498)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따라서 그도 무오사화에 연루돼 거제도로 귀양가 있다가 연산군 12년(1506) 6월 단천역(端川驛) 벽서(壁書·벽보)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부친과 형제들도 곧바로 처형됐다.

이해 9월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됐으니 이들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중종반정 후에는 이들 부자에게 작위가 추증되는 은전이 베풀어졌다.


당연히 몰수된 재산도 되돌려져서 조선 말기까지 이 양화나루 별장은 이총 후손이 소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무풍정 별서(別墅·별장)가 양화나루에 있다고 한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잠두봉 아래에 큰 규모로 지어진 기와집이 그 무풍정 별서라고 생각된다. 겸재는 아마 무풍정의 은거생활 장면을 떠올렸던 듯하다.

그래서 홀로 낚싯배를 저어나가 잠두봉 아래에서 낚싯대를 담근 선비 하나를 그려놓았다.

지금은 이 부근으로 양화대교와 당산철교가 지나고 있어 밤낮으로 소란스럽기 그지없으니 무풍정이 다시 온다 해도 이곳에 은거하지 않을 것이다.
 


(큰이미지)

영조 18년(1742)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