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동아일보 2002-10-03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귀래정은 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죽소 김광욱((竹所 金光煜·1580∼1656)이 행주 덕양산 기슭 행호강(현 창릉천)변에 세운 정자다.
그는 광해군 5년(1613)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다 모친상을 핑계삼아 병조정랑의 벼슬을 버리고 행주로 물러 나와 10년간 은거해 살았다.
인조 원년(1623)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벼슬을 살면서도 늘 행주로 돌아와 지내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옛날 물러나 살던 집을 고치고 그 정자에 귀래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동진(東晋)시대 대표적인 은거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이름이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인 1742년에는 김광욱의 증손자인 동포 김시민(東圃 金時敏·1681∼1747)이 주인이 되어 서울 집을 오가며 살고 있었다. 김시민은 겸재와 인왕산 밑 한 동네에서 사는 친구로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1651∼1708)과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김시민은 사천 이병연(사川 李秉淵·1671∼1751)과 함께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1564∼1635)의 외현손이라 서로 8촌 형제에 해당하는 친척간이었다. 그러니 겸재와 사천은 어려서부터 김시민과 함께 이 귀래정을 무시로 출입했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낙건정(樂健亭) 주인 김동필(金東弼·1678∼1737)은 사천의 이종사촌 아우이면서 김시민과도 8촌 형제간이었고,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1689∼1746)까지도 이정구의 외현손이었다. 당연히 송인명은 이병연, 김동필, 김시민과 서로 8촌 형제에 해당했다.
겸재와 사천이 행주의 3대 별장인 귀래정(歸來亭)과 장밀헌(藏密軒), 낙건정(樂健亭)을 제집처럼드나들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그래서 겸재와 사천은 진경산수화와 진경시로 이를 기회 닿는 대로 사생해 냈으니 이 ‘귀래정’도 그런 겸재의 그림 중의 하나다.
덕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강변 산자락에 큰 규모의 기와집이 지어져 있다. 행랑채,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안채로 꾸며진 호사스런 대가 집 규모다.
본채 오른쪽 뒤로는 별당이 하나 있고 왼쪽 쪽문 밖으로는 정자가 우뚝솟아있다.
이것이 귀래정인가 보다.
그 앞에 소나무와 전나무가 쌍으로 서있고 집 뒤편은 온통 잡목 숲으로 뒤덮여 있다.
덕양산은 솔숲으로 가득 찼으며 강변으로 이어지는 앞마당 가에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서 숲을 이뤘다. 단촐한 기와집 한 채가 마을을 가려주는 오른쪽 앞산 기슭에 따로 지어져 있다. 이것이 김시민의 양자인 강재 김면행((强齋 金勉行·1702∼1772)과 그의 친형인 김현행(金顯行·1700∼1753) 형제가 기거했다는 연체당(聯왰堂)이 아닌지 모르겠다.
솔숲에 둘러 쌓인 그 집 아래 강가에는 이 집 전용인 듯한 거룻배 한 척이 매어져 있다. 으리으리한 이 대가 집에 어디서 무엇을 실어다놓고 나가는지 쌍돛단배 한 척이 돛폭에 골바람을 받으며 강으로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작은 거룻배 한 척까지 달고가는 것을 보면 그 규모가 어지간한 듯하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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