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달리 가을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제주도는 당연히 가을이 늦고 여름이 더디게 물러갑니다. 어쩌면 제주도의 여름은 가으내 머물러 있다가 겨울 찬바람에 등 떠밀릴 때라야 마지못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듯합니다.
10월인데도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제주도는 가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라산 고지대 쪽은 사정이 다릅니다. 10월이면 벌써 단풍옷으로 갈아입고 매무새를 고쳐 앉습니다. 그렇게 한 시기에도 지역마다 온도차가 나타나는 곳이다 보니 제주도는 다양한 식물이 자랄 만한 조건이 됩니다.
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익는 섬다래는 아직 육질이 단단하게 만져집니다. 섬다래는 제주도와 전남의 섬 지방에서 드물게 자라는 덩굴나무로, 남해안 섬 지역 사람들의 어릴 적 영양 간식으로 통합니다. 겉모습이 작은 키위 같아서 갈색 털이 많고, 익으면 다래처럼 단맛이 납니다.
키위하면 뉴질랜드를 떠올리지만 키위가 원래부터 뉴질랜드의 식물이었던 건 아닙니다. 키위는 중국 양자강 연안에서 자라는 과수였던 것을 뉴질랜드에 들여와 개량해 만든 품종입니다. 갈색 털로 덮인 열매의 모습이 뉴질랜드에만 서식하는 새인 키위를 닮아 이름 붙여졌습니다(키위 새는 수컷이 ‘키위(keewee)’ 하고 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남의 나라 식물이었지만 전 세계 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자국 생산량의 90%를 수출할 정도로 키위는 뉴질랜드에 엄청난 소득을 안겨다주는 작물이 됐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섬다래에 있습니다. 다래, 개다래, 쥐다래보다 섬다래가 키위와 가장 유사하므로 교잡을 통해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큽니다.
섬다래를 보러 간 농장에는 전에 없던 왕도깨비가지가 세력을 넓혀가는 중이었습니다.
도깨비가지보다 늦게 들어온 왕도깨비가지는 남미 원산의 귀화식물로, 제주도 서부 지역의 목장 주변에서 방대하게 퍼져 자랍니다. 당오름 같은 곳만 해도 왕도깨비가지가 그 주변 목장의 목초지에 침입해 날로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길고 날카로운 가시가 여기저기 나 있어 소나 말 같은 동물이 먹지도 않고 다가가지도 않아 천적이 없다 보니 매우 빠르게 번집니다. 보다 못한 어느 단체에서 작년 11월경에 당오름에서 대대적인 제거작업을 펼쳤습니다.
그 모습이 재배한 약초를 수확하는 것처럼 보이자 어떤 분이 약초 캐느냐고 물었다가 용감무식한 사람으로 간주됐다는 재미난 글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왕도깨비가지가 들판에 가득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왕도깨비가지 제거작업은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왕도깨비자리를 캐낸 자리에 유럽장대가 들어와 대량으로 자라게 된 것입니다. 귀화식물을 캐낸 자리를 그대로 방치하다 보니 다른 귀화식물이 자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 셈이 됐습니다. 제거 작업 후에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제거 작업은 말짱 도루묵이 되는 것입니다.
제주도의 희귀식물을 집약시켜놓은 한라수목원에는 몇몇 나무가 가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왜나무 열매는 붉게 변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축 늘어졌고, 말오줌때도 붉은 지갑 속의 흑진주 같은 씨를 열어 보입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어서 청혼하라고 재촉하는 듯합니다.
한라수목원의 교목원에는 동백나무겨우살이로 뒤덮인 동백나무가 있습니다. 일부러 심은 건 아닌 것 같고, 우연히 들어와 자라게 된 것 같은데 규모가 상당합니다. 다른 나무에 얹혀사는 기생식물이라 평생 동안 흙을 묻히지 않는 얌체지만 전적으로 기주식물에 의존해 사는 건 아닙니다.
몸빛이 녹색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 광합성을 합니다. 그런 식물을 반기생식물이라고 하며 동백나무겨우살이 역시 그러합니다. 즉, 동백나무에 빨대를 꽂고 피 빨아먹듯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동백나무겨우살이는 이름만 그럴 뿐 동백나무에만 기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로 상록 활엽수에 기생하며 낙엽 활엽수에도 기생합니다. 전초를 백기생(柏寄生)이라고 해서 약초로 쓰는데, 어떤 나무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약성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중 동백나무에 기생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에 자라는 것은 독성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하니 아무거나 함부로 섭취하는 건 좋지 않다 하겠습니다.
다 자라봐야 손바닥 한두 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동백나무겨우살이가 기주목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동백나무겨우살이가 앉은 나무는 3년 안에 죽는다는 식의 허황된 괴담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기주목이 죽게 되면 자신들도 죽는 건데 뭐 하러 그런 무모한 짓을 하겠습니까? 한라수목원의 동백나무겨우살이만 해도 새떼처럼 줄줄이 앉아 동백나무를 괴롭히는 모습을 본 지가 개인적으로 9년이 넘어가지만 아직 그 동백나무는 잘 버텨내고 있습니다. 다만, 수세가 좋아 보이지 않아서 언젠가 시름시름 앓다가 가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동백나무겨우살이는 왜 하나의 나무에 그렇게 많은 수가 함께 자라는 걸까요? 기주목의 생명을 위협해가면서까지 말입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동백나무겨우살이의 열매를 먹은 새들이 멀리 이동해서 배설하는 게 아니라 열매를 먹으면서 거의 그 자리에서 배설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먹는 곳과 싸는 곳이 같다 보니 식탁이자 화장실로 쓰인 동백나무에는 동백나무겨우살이가 그렇게 떼거지로 자라기 십상인 모양입니다.
여름에게 빼앗긴 9월은 이제 가을이 아닙니다. 10월도 초순에는 좀 애매하고요. 하지만 가을이 오는 때를 기다려 피는 꽃들이 있기에 가을입니다. 짧아진 계절이니만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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