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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봄의 제전

바람아님 2018. 3. 12. 08:25


중앙일보 2018.03.10. 01:30


오리라는 기대마저 포기했을 때 곁으로 다가온 봄
겨울을 이겨낸 힘으로 자신만의 축제를 준비해야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마침내 봄이다. 겨울이 너무 춥고 길었던 탓일까.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마저 포기했는데. 자연이 일하는 바는 오묘한 데가 있다. 그래서 시인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오는” 봄이라고 했나 보다. 다가온 봄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쌀쌀한 바람은 아직도 외투와의 이별을 힘들게 하지만 그 바람 속에도 은은한 온기가 배어있고 양지쪽 길가의 잡초도 어느새 밑동부터 푸른 빛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추운 동계올림픽이 될 것이라는 걱정을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계절의 변화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봄의 신비를 느끼기로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보다 좋은 음악이 없다. 원초적인 생명력이 꿈틀대고 원시적인 에너지가 넘쳐난다. ‘봄의 제전’은 파리 초연 당시 경찰까지 출동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존의 틀과는 너무 다른 연주 때문에 객석은 야유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고, 청중들의 빗발치는 항의는 폭동을 방불케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들어봐도 예측하기 힘든 강세와 불규칙한 리듬은 여전히 파격적이다. 그러니 100년 전 초연되었을 때 청중들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소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음악 자체보다는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줄거리와 니진스키의 선정적인 안무였다. 지금이야 연주곡으로 더 널리 감상되지만 원래 ‘봄의 제전’은 발레 음악이다.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이국풍의 예술이 한참 인기를 끌 때 여기에 편승해서 러시아 발레단의 단장 디아길레프가 야심 차게 기획한 공연이었다. 발레는 원시사회 러시아 이교도들의 태고 의식을 재현한 것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제전에서 봄의 신을 위해 젊은 처녀를 제물로 바친다는 내용이다. 함께 춤을 추던 사람 중 하나를 뽑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면서 벌이는 춤사위는 원시적인 무질서와 종교적인 광란 그 자체이다.


봄을 위해서 사람이 제물로 죽어야 한다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끔찍한 일이지만 원시 종교에서 인신공양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죽음과 삶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당시 사람들에게 겨울은 죽음이고 봄은 삶이다. 매서운 추위와 허술한 거주 환경, 부족한 식량 때문에 봄이 오지 않으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봄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은 점점 줄어들기만 하고. 그러니 이들에게 봄은 그야말로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던 셈이다. 그래서 ‘봄의 제전’은 과격할 정도로 격렬하고 강한 리듬으로 듣는 이들의 무의식적 본능을 자극하고 마음을 달아오르게 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동서양이 따로 있을까. 어디나 봄을 노래하는 음악은 유난히 많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보다 겨울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던 시절, 그만큼 절실함도 컸다는 것. 그래서 봄노래는 하나같이 즐겁고 경쾌하다. “에야 뒤야, 봄이 왔네”라고 외치는 남도 민요 봄 타령이 그렇고,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 그렇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를 듣자면 봄을 향한 종달새의 들뜬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어렸을 때 우리도 얼마나 신나게 봄을 반겼던가.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우리들 마음속에도”를 부르면서 말이다.


봄이 아름답고 설레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향한 기대 때문이다. 학생들은 새 책을 꺼내고 농부들은 늦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누군가는 새로운 계획을 시작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사랑을 꿈꿀 것이다. 좋은 일에 어찌 방해가 없을까. 꽃을 시샘하는 추위도 있고 춘설이 내리기도 한다. 황사나 미세먼지도 걱정이고, 꽃가루 알레르기 역시 봄의 불청객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새봄에 거는 우리의 기대를 어쩌지는 못한다.


겨우내 깊이 묻어두었던 기대와 욕구들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가는 느낌은 봄날 아지랑이를 닮았다. 무엇이든 기대하고 준비할 때가 가장 즐거운 법이다. 자기만의 화려한 봄의 제전을 준비하면서.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