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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4] '열린 음식' 잡채

바람아님 2018. 5. 18. 13:49

(조선일보 2018.05.18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재외공관 근무 시절, 외국인을 초청하여 한국 음식을 대접하는 외교 행사를 할 때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잡채였다.

인종, 국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잡채를 먹어본 외국인들은 '엄지 척'과 '테이스트 굿(taste good)'을 연발한다.


대사관 행사의 주역이 될 정도로 잡채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그러나 잡채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연 한국 전통 음식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잡채(雜菜)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 잡채는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를 쓰는 요리라는 의미일 뿐 우리가 알고 있는 잡채와는 거리가 멀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현대 한국인들이 즐기는 잡채는 사실 20세기에 탄생한 '하이브리드(hybrid)' 음식이다.

잡채의 주재료인 당면은 중국 산둥 지방 유래의 녹말면이다. 이름부터 '당면(唐麵)'이다.

중국 베이징에서는 펀쓰(粉絲), 일본에서는 하루사메(春雨)라고 한다.

한반도에 당면이 식재료로 들어온 것은 1910년대 이후이며, 당면을 사용한 잡채가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1960년대 이후이다. 분식 장려 운동의 영향으로 고구마 녹말면의 활용법을 찾다가 (당면 순대와 함께)

지금과 같은 당면 잡채 조리법이 퍼졌다고 한다.


당면의 원산지가 어디이건 잡채는 이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코리안 푸드'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달달 볶은 소고기와 양파의 고소한 향을 덧입힌 쫄깃한 당면을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부재료인 시금치와 당근은 영양 균형과 청홍(靑紅) 대비의 시각적 즐거움마저 더한다.

잡채는 이처럼 외부 것에 한국적 미감(味感)과 미감(美感)이 버무려져 새로운 보편성을 획득한 사례이다.


전통은 닫힌 순수성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1+1=3' 또는 'A+B=C'의 열린 가능성을 추구할 때 더욱 굳건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가장 세계적인 것을 흡수하여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재창조하는 능력과 동전의 양면 관계가 아닌가 한다.

그러한 발상 전환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