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광화문]원전, 굴기와 포기

바람아님 2018. 6. 30. 05:11

머니투데이 2018.06.29. 04:47

 

헨리 키신저의 말을 빌리면, 에너지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뒤집으면, 에너지가 없으면 지배당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각국은 에너지 패권까지는 아니어도 에너지 주권을 위해 분투한다. 에너지가 없으면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다. 석유나 전기가 끊기면 국가의 생명도 끊긴다.


중국의 일대일로 건설이나 전방위적 자원확보는 에너지 패권 경쟁의 일환이자 생존의 방편이다. 석탄과 석유 위주에서 LNG, 태양광, 풍력, 원자력 등으로 다변화를 꾀한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


중국과 한국이 다른 것은 원자력발전에 관한 스탠스다. ‘탈원전’인 한국과 달리 일본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한동안 원전건설을 멈췄던 중국은 오히려 ‘원전굴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은 제13차 5개년 경제사회개발계획(2016~2020년)에서 2020년 원전 발전용량을 8800만㎾로 늘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원전대국을 지향한다. 2030년엔 세계 1위가 목표다.


중국은 지난 2월 최대 원전 운영사 중국핵공업집단(CNNC)과 원전 건설업체 중국핵공업건설집단(CNECC)을 합쳐 덩치를 키웠다. 기술력을 높이고 수출에 대비하려는 포석이었다. 지난 3월 중국 양회에서 처음 거론된 핵공업대학도 논의 3개월 만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원자력산업에 필요한 고급인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라기 때문이다.


중국의 원전은 다목적용이다. 태양광과 풍력만으론 감당이 안 되는 전력을 확충하고 석유와 석탄의 의존도를 줄이는 게 1차 목표다.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다. 일자리를 늘리고, 경기부양을 하는 경제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원전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스마트팩토리 등의 기술과 결합하므로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의미가 있다. 수출로 달러를 확보하면 외환보유액도 그만큼 늘어난다. 중국이 원전정책을 재개할 때 시진핑 국가주석은 “세계로 가야만 한다”며 직접 원전수주를 위해 움직였다.


한국은 중국과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2022년까지 운영 허가를 받은 월성1호기 원자력발전소를 조기에 닫기로 했다. 경북 영덕 등에 짓기로 한 신규 원전 4기도 백지화했다. 기술과 운영능력에서 세계 최고인 한국이 원전을 접으면 글로벌 원전시장은 중국 천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에너지 전환 정책에 따라 지어놓은 LNG 발전설비의 가동률을 높이고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원의 활용을 높이는 것은 그것대로 해야 한다. 가스관으로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들여오거나 동북아 슈퍼그리드에 대한 청사진도 그려가야 한다. 그러나 미래의 불확실한 것에 기반해 현재의 확실성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신한울 3, 4기마저 짓지 않는다면 신고리 5, 6호기가 완성되는 시점에 한국의 원전산업은 사실상 명맥이 단절된다. 핵심인력은 중국 기업으로 갈 것이고, 부품업체들이 망해나가면서 원전 생태계는 파괴될 것이다. 한국형 원자로(APR-1400)는 폐기처분되고 60년 동안 쌓아올린 노하우는 사장될 것이다.

LNG 가격이 뛰거나 공급이 불안정할 때, 태양광과 풍력발전을 쓰기 어려울 때를 대비해야 한다면 에너지 빈국인 한국이 에너지 포트폴리오에서 원전을 들어내는 것은 국익을 저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반도체에서 중국의 추격을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원전에서 후발주자인 중국의 질주도 무서워해야 한다.

         
다른 에너지들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언제든 복원할 수 있도록 노후원전을 폐쇄한 만큼이라도 새 원전을 짓는 방식으로 ‘에너지믹스’에 원전을 넣어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중국 좋은 일만 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가 없으면 그 에너지를 지배하는 나라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기택 경제부장 ace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