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시간강사법의 역설

바람아님 2018. 12. 21. 10:29

(조선일보 2018.12.21 박은호 논설위원)


"세상이 밉습니다." 2010년 지방에서 시간강사를 하던 박사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 '스트레스성 자살'이라고 썼다.

10년 넘게 시간강사로 일하며 논문 54편을 지도교수와 그 교수의 제자 이름으로 대필했다고 한다.

교수에게 밉보이면 6개월마다 계약하는 시간강사 자리나마 보전하기 어려워 '노예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강의 시급 3만3000원에 월 100만원가량 박봉도 힘겨웠을 것이다.


▶시간강사가 자신을 자조적으로 부르는 말이 '유령' '보따리 장사'다.

정해진 연구실도 없고 이 대학 저 대학을 옮겨 다니며 강의하느라 대학에서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존재라는 뜻이다.

전국에서 시간강사 7만6000명이 대학 강의의 22%쯤을 맡고 있다. 대학마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1000명이 넘는다.

한국비정규교수노조에 따르면 보통 1주일에 6시간 강의하는 사립대 시간강사가 퇴직금까지 포함해 받는 연봉이

900만원 수준이다. 주당 9시간을 강의해야 연봉 1350만원을 받는다.

10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땄다는 한 시간강사는 "가방끈 긴 '거지'가 시간강사"라고 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앞서 말한 시간강사의 죽음을 계기로 2011년 강사법(고등교육법)이 개정됐다. 그 후 세 차례나 시행이 유예되다

지난달 개정안이 다시 국회를 통과했다.

내년 8월부터 교원 지위가 법적으로 보장돼 4대 보험 혜택을 받고, 1년 이상 강의하면서 3년간 강사직을 유지할 수 있다.

수업이 없는 방학에도 같은 임금을 받는다. 적어도 유령 신분은 벗게 된 셈이다.


▶그런데 법 통과 한 달도 안 돼 이 강사법이 오히려 시간강사의 목줄을 죄는 역설적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재정난에 빠져 있는 대학들이 시간강사를 대량 해고하거나 강좌 수 축소, 교수 강의 증가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들은 지난 10년간 등록금 인상이 동결된 데다, 인구 감소로 입학 정원까지 줄어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하다.

시간강사의 30% 이상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처음부터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 했다. 최저임금 사태, 주 52시간 사태가 다 마찬가지다.

아직 받아들일 능력이 안 되는데 강제로 밀어붙이면 도우려 했던 약자가 오히려 더 피해를 보는 역설이 벌어진다.

이 정부는 이런 부작용이 벌어지면 국민 세금으로 '쉽게' 해결한다.

음식점 주인에게도, 택시 기사에게도, 전등 끄기 알바에게도 세금을 퍼준다는데 시간강사라고 안 될 일이 뭐냐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