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12.23. 09:11
겨울철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 성탄트리
'휘게의 나라' 노르웨이 나무 반짝반짝
1940년 나치 침공 당시 영국군 지원
노르웨이군보다 영국군 사상자가 더 많아
노르웨이, 47년부터 런던에 전나무 선물
국난 때 도와준 동맹국 친구에 감사 인사
그런데 런던에 세우는 트라팔가르 성탄 트리는 역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갑니다. 매년 트라팔가르 성탄 트리에 쓸 전나무는 노르웨이에서 선물로 보냅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전나무를 하나씩 잘라 영국의 수도 런던의 시민들에게 선물로 보내고 있습니다. 1947년 시작한 이 전통은 70년이 지나도록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매년 노르웨이의 숲에서 선물용 전나무를 골라 벌목하는 현장부터 런던의 대표가 참석합니다. 올해는 11월 20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마리안 보르겐 시장과 린제이 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의회 의장이 함께 노르웨이 숲에서 런던 트라팔가르에 세울 나무를 벌목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구는 런던 한복판에 있으며 런던 25개 구를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런던은 매년 12월 초 성대한 기념식과 함께 런던 한복판의 트라팔가르 광장에 이 전나무를 세우는 행사를 엽니다. 올해는 12월 6일 마리안 보르겐 오슬로 시장과 린제이 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의회 의장이 나란히 참석했습니다. 함께 성탄 트리에 쓸 나무를 자르고, 이를 세우는 행사에 참여하면서 70년 넘게 우정과 감사의 전통을 이어나갔습니다. 전나무는 멋지게 장식돼 성탄 시즌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이 전통의 배경에는 비극적인 역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동화와 휘게의 나라’로 유명한 스칸디나비아의 조용한 나라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아 점령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치 독일은 1940년 4월 9일 공격을 시작해 6월 10일 노르웨이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독일군은 무차별 폭격, 함상 포격 등 무시무시한 공격으로 노르웨이의 작은 도시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속전속결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군은 “중립을 지켜주려고 왔다”는 궤변을 늘어놨습니다. 연합군 도·감청 부대를 기만하려고 했던지 작전 암호명부터 ‘베저 위붕’, 즉 ‘베저강 훈련’이라는 지었습니다. 연습인 척 하고 기습 공격을 가하려고 한 정황 증거인 셈입니다.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운 평화 공세, 기만적인 작전 이름은 침략과 기습 공격의 전조임을 잘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노르웨이 정부의 도움 요청을 받은 영국이 원정군을 파견해 독일군에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전역’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6602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노르웨이인 사상자 1700명과 민간인 사망자 400명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영국군이 입은 것입니다. 어려울 때 도움이 손길을 펼치는 친구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 것이죠.
그 뒤 2차대전이 나치의 패배로 끝나고 노르웨이는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손에 해방이 됐습니다. 5년 동안 나치에 점령당해 혹독한 시절을 보냈던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주민들은 전쟁 당시 영국의 참전과 노르웨이 레지스탕스에 대한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성탄 트리에 쓸 노르웨이 전나무를 하나씩 잘라 영국의 수도 런던의 시민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영국인과 영국군의 희생과 도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한 겨울 내내 런던 시민에게 전달되는 셈입니다. 노르웨이는 매년 미국 워싱턴DC에도 같은 의미로 감사의 성탄 트리를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참전으로 2차대전에서 나치를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죠.
'휘게의 나라' 노르웨이 나무 반짝반짝
1940년 나치 침공 당시 영국군 지원
노르웨이군보다 영국군 사상자가 더 많아
노르웨이, 47년부터 런던에 전나무 선물
국난 때 도와준 동맹국 친구에 감사 인사
성탄 트리는 차가운 밤 풍경을 따뜻하게 꾸며주고 우리에게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겨울철 대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조형물은 단연 성탄 트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에서도 도시 한복판인 서울 시청 앞에 대형 성탄 트리를 설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이 수도 워싱턴DC의 백악관 잔디밭에 국가 성탄 트리를 설치하듯이 영국도 도심인 트라팔가르 광장에 큼직한 성탄 트리를 세웁니다.
그런데 런던에 세우는 트라팔가르 성탄 트리는 역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갑니다. 매년 트라팔가르 성탄 트리에 쓸 전나무는 노르웨이에서 선물로 보냅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전나무를 하나씩 잘라 영국의 수도 런던의 시민들에게 선물로 보내고 있습니다. 1947년 시작한 이 전통은 70년이 지나도록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매년 노르웨이의 숲에서 선물용 전나무를 골라 벌목하는 현장부터 런던의 대표가 참석합니다. 올해는 11월 20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마리안 보르겐 시장과 린제이 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의회 의장이 함께 노르웨이 숲에서 런던 트라팔가르에 세울 나무를 벌목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구는 런던 한복판에 있으며 런던 25개 구를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이 전통의 배경에는 비극적인 역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동화와 휘게의 나라’로 유명한 스칸디나비아의 조용한 나라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아 점령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치 독일은 1940년 4월 9일 공격을 시작해 6월 10일 노르웨이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독일군은 무차별 폭격, 함상 포격 등 무시무시한 공격으로 노르웨이의 작은 도시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속전속결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군은 “중립을 지켜주려고 왔다”는 궤변을 늘어놨습니다. 연합군 도·감청 부대를 기만하려고 했던지 작전 암호명부터 ‘베저 위붕’, 즉 ‘베저강 훈련’이라는 지었습니다. 연습인 척 하고 기습 공격을 가하려고 한 정황 증거인 셈입니다.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운 평화 공세, 기만적인 작전 이름은 침략과 기습 공격의 전조임을 잘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노르웨이 정부의 도움 요청을 받은 영국이 원정군을 파견해 독일군에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전역’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6602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노르웨이인 사상자 1700명과 민간인 사망자 400명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영국군이 입은 것입니다. 어려울 때 도움이 손길을 펼치는 친구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 것이죠.
노르웨이의 호콘 7세 국왕과 올라프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과 정부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군이 ‘항복이냐, 죽음이냐’를 압박하자 절대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망명해 계속 항전하기로 결정한 셈입니다. 당시 4000여 명의 노르웨이 육군 장병이 탈출해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망명부대를 세우고 재정비를 했습니다. 노르웨이인들은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나치 침략자에 저항했습니다. 영국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그 뒤 2차대전이 나치의 패배로 끝나고 노르웨이는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손에 해방이 됐습니다. 5년 동안 나치에 점령당해 혹독한 시절을 보냈던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주민들은 전쟁 당시 영국의 참전과 노르웨이 레지스탕스에 대한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성탄 트리에 쓸 노르웨이 전나무를 하나씩 잘라 영국의 수도 런던의 시민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영국인과 영국군의 희생과 도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한 겨울 내내 런던 시민에게 전달되는 셈입니다. 노르웨이는 매년 미국 워싱턴DC에도 같은 의미로 감사의 성탄 트리를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참전으로 2차대전에서 나치를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죠.
노르웨이 북부 도시 베르겐은 매년 영국의 뉴캐슬어폰타인에 시청 앞을 밝힐 성탄 트리를 선물합니다. 이 도시 출신으로 구성된 영국군 부대가 나치로부터 베르겐을 해방한 인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국에는 육군 부대에 도시나 주 이름을 붙이고 주로 그 지역에서 징집한 병력으로 부대원을 구성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물론 징집은 전시에만 하기 때문에 평화 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노르웨이는 유럽연합(EU)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는 회원으로 남아있습니다. 침략을 당한 역사적 교훈이 동맹의 가치를 잘 알려줬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트라팔가르의 성탄 트리는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를 웅변하는 역사의 증거가 아닐까요.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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