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용 경제산업부 차장
문재인 대통령은 과연 소득주도성장의 ‘족보’를 직접 읽어봤을까. 혹시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같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운동권 출신 참모들이 올린 보고서만 읽고 홀딱 반한 것은 아닐까. 문 대통령이 최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은 세계적으로 족보가 있는 이야기”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족보로 불릴 만한 자료들을 오랜만에 훑고 나서 든 의구심이었다. 대통령이 족보만이라도 제대로 공부했다면 이렇게까지 집착하진 않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감성에 치우쳐 본인이 말한 족보를 읽어보지도, 깊이 공부하지도 않은 채 우리 경제를 끌고 가고 있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인 만큼 대통령 발언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일 임금주도성장이 소득주도성장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를 설명하고, “원래 국제노동기구(ILO)가 오래전부터 임금주도성장을 주창해 왔고, 이 임금주도성장이 많은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말한 적도 있다”고 족보의 사례를 꼽았다. 우선, ILO 얘기에서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다. 소득주도성장의 뿌리로 꼽히는 족보는 ILO가 2012년 내놓은 논문인 ‘임금주도성장 : 개념, 이론과 정책(Wage-led growth : Concept, theories and policies)’이다. 마르크스 경제학파의 아류로 평가받는 ‘포스트 케인지언’ 쪽 이론이다. 그러나 이 논문을 읽으면 임금주도든, 소득주도든 수출 중심의 경제이면서도 자영업자 비중이 이례적으로 높은 한국엔 도저히 적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든다. 이 논문도 한계를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무엇보다 “임금주도성장 전략이 생존하기 위해선 국제적 공조가 이뤄져야 한다” “전 지구적인 케인스식 뉴딜이 필요하다”는 결론 부분이 가장 큰 문제다. 국제적 공조, 즉 다수 국가가 동시에 최저임금을 급등시키면 임금주도성장 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복수의 국가에서 실패한 것을 목도한 상황에서 국제적 공조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한 나라만 움직이면 그 나라의 수출 경쟁력과 고용 상황만 나빠질 게 뻔하다.
오바마 전 대통령 이야기도 따져봐야 한다. 오바마 정부가 최저임금 급등 정책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미 연방 정부의 최저임금이 7.25달러, 원화로 8000원대로 미국의 경제력과 물가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국은 캘리포니아 등 비교적 부유한 주를 중심으로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했거나 점진적으로 인상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영향으로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무인 판매 시스템이 경쟁적으로 도입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보도도 속속 나오고 있다.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최저임금을 올린 주에서 식당 고용이 대량 감소하는 등 피해 통계가 보고된 바 있다. 중간평가를 하자면 오바마식 소득주도성장 역시 점차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낸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문 대통령의 족보 논란에 이렇게 반응했다. “소득주도성장의 외국 족보는 이미 철저하게 실패했거나 우리 경제 현실과 완전히 다른 사례다. 우리가 따를 만한 족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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