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4.13. 03:01
#1. 정규 프로그램 '오늘밤 김제동'을 마치고 4일 밤 11시 25분쯤에야 재개된 KBS 산불 특보. 피해 상황을 묻는 앵커의 질문에 현장 기자는 답변한다. "이번 불은 저녁 7시쯤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한 야산에서 발생해 불이 나자…." 그 뒤로 보이는 장면은 활활 타오르는 산불의 모습. 자막은 평소와 비슷한 크기로 '초속 20m 이상 강풍으로 진화 어려워'라는 한 줄이었다.
주민 대피 관련 안내 보도는 이랬다. "이번 산불은 강한 서풍을 타고 해안가로 번지면서 곳곳에서 주민 대피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구성군 원암리와…." 자막은 '속초, 고성 지역 대피소 10여곳에 3천여명 대피'라는 한 줄이었다. 가장 중요한 대피소 위치에 대해서는 기자의 대략적인 멘트만 있을 뿐, 지도도 안내도 없었다. 뉴스만 봐서는 대체 불이 어디로 확산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2. 2016년 11월 22일 오전 6시 일본 NHK '좋은 아침 일본' 방송. 1분 전인 오전 5시 59분 일본 후쿠시마에 규모 7.3, 진도 5의 지진이 발생했다. 방송 시작 17초 만에 벨 소리와 함께 '긴급 지진 속보 후쿠시마현 먼바다에서 지진. 강한 흔들림에 주의, 후쿠시마, 미야기, 야마가타, 이바라키, 도치기'라는 자막과 지도가 뜬다.
이후 진행자들은 재난 방송 모드로 전환해 지진 피해, 위험 지역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며 "해안이나 강 근처에서 떨어지십시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장 대피하십시오…. 동일본대지진을 떠올리십시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지금 당장 도망치십시오"를 강조한다. 속보 화면도 '해일 도달 예상 시각' 등을 표, 지도와 함께 보여준다. NHK 방송만 보고 있어도 '상황룸'에 있는 것 같았다.
"뒤늦은 방송조차 허접하고 강 건너 불구경 수준, 일본은 자막과 음성으로 계속 안내를 해주던데 우리나라는 그에 비해 막말로 '재난 포르노' 수준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국내 한 대학 내부 커뮤니티에 올라온 KBS 재난 방송에 대한 비판이다. 댓글도 "서울 사람들 불구경 하라고 틀어주는 수준" 등의 반응이 달렸다.
국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재난 시에는 유일한 수단이 TV나 라디오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 TV를 켤지 모르기 때문에 지겨울 정도로 같은 정보를 계속 읊어주면서 어디로 어떻게 피난해라, 뭘 조심해라, 어디 지역 조심해라를 반복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 커뮤니티 다른 사용자도 "KBS는 실시간으로 정보 전달 브리핑을 하는 게 아니라 약간 지나간 뉴스를 정리해주는 느낌"이라고 비판했다.
국내 재난 방송이 정보 전달보다 생생한 화면 방영이 주(主)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삼풍백화점 붕괴 때는 건물이 무너져 폐허가 된 모습을, 세월호 참사 때는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등 국내 재난 방송은 시청자들을 채널에 붙잡고 생생한 현실감을 주기 위해 자극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곽 교수는 이런 '재난 포르노' 같은 자극적인 화면 위주의 재난 방송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재난을 당했을 때 받게 되는 정신적 충격인 PTSD가 화면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 곽 교수는 "감수성이 민감한 청소년들, 심리적으로 약한 아이들이 이런 식의 화면을 볼 경우 PTSD를 겪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둘째 위험은 재난 보도 시청자의 전도(顚倒)다. 재난 방송은 재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방송이어야 하는데, 이런 자극적인 화면 위주의 방송은 그런 정보 전달의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이런 방송은 서울 사람들이나 그 외 사람들이 보는 수준에만 그칠 뿐 정작 재난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라, 어디로 가라는 식의 안내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방송통신발전기본법에 따르면, 방송은 발생(재난)을 예방하거나 대피·구조·복구 등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재난 방송을 송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청자의 시선을 끌도록 평소보다 크기가 큰 자막과 안내 화면, 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 등이 필요하다.
KBS 재난 방송에 대한 비판은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KBS 공영노조는 지난 10일 '산불 재난 외면 김제동 방송, KBS는 공공의 적이 되었나'라는 제목의 노보를 통해 "불이 활활 타오를 때 산불 대피 요령 안내 자막조차 방송하지 않았다"며 "재난 주관 방송이지만 컨트롤 타워조차 없었다"고 비판했다. 양승동 KBS 사장의 해명은 "산불 방송은 15년 전 한 번 했을 뿐이라 노하우가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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