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4.27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봄이 되면 김훈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을 읽는다. 반복했기 때문에 어떤 문장은 외울 수 있다.
가령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나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같은
말은 이제 특정 꽃을 보면 바로 몸속에 스민다.
오랜 습관인데 이런 행동이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라는 책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에이미 벤더라는 작가를 찾아냈다.
"과시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 말들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는 게 좋았다. 나는 시를 좋아하니까.
스티븐슨의 시를 내 안에 지니고 싶었다.
그것과 같이 살고 싶었다… 전부 외우고 나니 감정이 한껏 고양되었다…
아름답고도 흥미롭게 조각한 언어는 몸에도 좋은 것 같다. 영양과 활기를 준다.
보통 문학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우리 머릿속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한다.
스티븐슨의 시를 읽고 기운이 솟는 느낌은 언어가 이렇게 우리 육체에 새겨지는지를 일깨워 준 독특한 경험이었다."
24시간 연결 사회에서 암기와 암송의 기능은 쇠퇴하고 있다.
그러나 시란 원래 눈으로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암송에 최적화된 노래에 가까웠다.
음유시인 역시 중세 유럽에서 봉건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을 뜻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에 보면 과거에는 음독과 낭독만이 존재했다
(묵독은 마녀의 독서법으로 중세 때 금지돼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필사하지 않고 글을 암기해야 제대로 된 지식이라 생각했다.
도무지 의욕이 나지 않고 괴로울 때, 암송할 수 있는 문장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부쩍 지치거나 눈가의 주름이 유난히 깊어 보일 때, 내가 비타민처럼 섭취하는 문장이 있다.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어린 날이다. 자신만의 좋은 문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자다.
나만의 문장은 안전지대의 울타리를 만드는 일이다.
자전거 여행. 1 | |
자전거 여행. 2 |
이 문장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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