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 어디가 싼지 따지는데
兆단위의 세금 물 쓰듯 ‘펑펑’
받아만 먹다 죽게 된 英 갈매기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 자꾸
젊은이들만 보면 괜히 자책감
살기 팍팍한데 ‘초고령 짐’까지
영국의 한 해변에 ‘갈매기한테 절대로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세워져 있다.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피자 조각, 과자 부스러기에 맛을 들인 새들이 고기를 잡지 않고 사람들 손만 쳐다보기 때문이다. 지방 관청이 부랴부랴 나서 먹이 주기를 원천 봉쇄했더니, 이게 또 무슨 일!? 갈매기들이 일제히 백사장에 내려앉았다. 가만히 있어도 달콤한 음식을 주는데 무엇하러 힘들게 사냥을 하느냐! 맛도 없는 물고기는 이제 싫다! 웃지 못할 농성이 계속되면서 갈매기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그대로 굶어 죽었다. 그런다고 다시 피자와 쿠키를 갖다 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 어… 하는 사이 해변이 온통 갈매기 사체로 뒤덮였다. 하루에만 대형 트럭 한가득 사체를 실어내야 했다. TV 리포터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이 사태에 새대가리라고 혀만 찰 일인가!”
사실은 우리 주변의 개·고양이도 큼직한 고깃덩이나 생선을 몇 번 주고 나면 그날부터 밥(사료)을 먹지 않는다.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우리 인간은 어떨까? 매달 주던 월급을 두 달만 안 줘 보라. 갈매기는 백사장에 드러눕지만, 월급쟁이는 머리띠 두르고 아스팔트에 눕는다. 실력 행사 면에서 아이들이 훨씬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설날 세뱃돈을 3만 원이나 5만 원을 주다가 어느 해 달랑 5000원을 줘 보라. “이게 뭐야? 더 주세요!” 떼를 쓰는 건 유치원생이고, 초등학교 3학년만 되면 급격히 줄어든 ‘수입’에 충격을 받고 고뇌에 빠진다. ‘우리 집이 망했구나’ ‘엄마가 식당 알바를 나가겠네’ ‘대학 가서 등록금 부담 주고 싶지 않다. 일찍 군대 갈 거야!’
실제로, 어느 여고생은 부모가 깜빡 잊고 세뱃돈을 안 줬을 뿐인데, 입술을 꾹 깨물고 신발장으로 달려갔단다. 회사에서 잘린 아빠가 출근하는 척하곤 공원을 배회하지 않았는지 아빠의 구두 바닥을 살펴본 것이다.
이른바 ‘기대치의 붕괴’가 일으킨 촌극들이다. 물건이든 돈이든 주다가 안 주면 꼭 사달이 난다. 옛날 선비들은 속되다고 돈이라는 말을 잘 안 썼다. 대신 축의금, 전별금, 마음의 표시…, 예쁜 말이 꽤 많다. 돈은 ‘써야 맛’이라지만 돈이 늘 부족한 서민들은 받을 때가 최고로 즐겁다. 액수가 클수록 심장이 요동친다.
수출에 빨간불이 켜졌네 어쩌네 하면서도, 요즘같이 나라 곳간을 활짝 열어젖힌 시절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천문학적 돈(예산)이 연일 신문 방송을 달구고 있다. 좋은 나라를 만들고 민생을 위한다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일반 서민은 멸치 한 포를 사는 데도 전통시장이 싼지 마트가 나은지 따져 보고, 여럿이 공동 구매를 하고 그걸 다시 반품까지 하는데 몇백억, 몇천억, 조(兆) 단위 국민 세금을 그렇게나 간단히…. 참으로 말문이 막힌다. 해저 보물선을 한꺼번에 여러 척 건져 올린다 해도 그렇게 펑펑 쓰면 금방 바닥이 난다. 통일에 대비해 한 푼이라도 절약해 차곡차곡 실탄을 쌓아야 하는데, 오히려 빚더미 위에 다시 빚을 쌓는 형국이 아닌가. 충분히 뒷감당할 만한 비책이 있다면 투명하게 밝혀서 백성들이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맛있게 받아만 먹다가 어느 날 깨고 보니 굶어 죽게 된 영국 갈매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실제로 아침에 깨고 보니 1조 원도 10조 원도 아닌 백몇십조 원이라는 숫자가 TV 뉴스 화면에 떠 있었다. 너무 놀라 1 뒤에 0이 몇 개나 붙나 써 봤더니 야구장 전광판 동그라미보다 많고 길었다. 괜히 혼자 울적해져 생수병을 챙겨 들고 동네 야산을 갔다.
마침 일요일에 날씨까지 좋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큰소리로 웃고 떠들어댔다. 정치 이야기, 연예인 마약 문제, 최저임금이 어쩌고 하다가 다시 정치판으로 화제가 옮아갔다. ‘여당이 너무 선거를 의식한다’ ‘선거 의식 안 하는 정치인 한 명이라도 있나 데려와 봐’ ‘그놈의 선거! 유권자 수준이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무슨…’ ‘말조심해라, 누가 나물이고 누가 밥인데?’ ‘조가 풀린대요. 쌀·보리·조, 그 조가 아니고요’.
이야기는 드디어 가짜뉴스 수준까지 가고 있었다.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아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20대 청년 하나가 바위 끝에 장승처럼 앉아 있었다. 말벗이 그립던 나는 슬쩍 다가가 생수를 권했다. 청년은 취업 고민을 하는지 여자 친구 생각을 하는지 물끄러미 자작나무 숲만 보고 있었다. 반가운 말벗이었지만, 젊은이만 보면 나는 괜히 미안하고 까닭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아니, 분명한 까닭이 있다. 젊은이들의 미래 재산을 그들 아버지, 할아버지뻘들이 미리 앞당겨 물 쓰듯 쓰고 있다. 먼 훗날 정권을 잡아본들, 텅 빈 곳간 열쇠! 저 살기도 팍팍한데 초고령사회 짐까지 떠안고 세계열강들과 피 터지게 싸워나가야 한다. 나는 새삼스레 청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이심전심일까? 청년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크게 고무된 나는 목소리를 높여 한강의 기적을 만든 주역들이 오늘날, 비에 젖은 낙엽 신세가 되었다고 탄식했다. 청년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은커녕, 봄볕처럼 따사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아저씨가 부럽습니다.”
나는 순간, 말귀를 얼른 못 알아들었다. “응? 부럽…?” 내가 되묻자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조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지하철 공짜로 타시잖아요! 그게 얼마나 큰 건데요! 나도 누가 교통비, 휴대폰 요금만 내주면 하루 한 끼만 먹어도 붕붕 날아다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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