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서민의 어쩌면]그래, 나 친일파다/[데스크의눈] 한국 경제 겨눈 아베의 칼

바람아님 2019. 7. 24. 08:22

[서민의 어쩌면]그래, 나 친일파다

경향신문 2019.07.23. 21:01
[서민의 어쩌면]그래, 나 친일파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은 반지하에서 아무 계획 없이 살던 이였다. 하지만 4수생인 기택의 아들이 부잣집 박사장 딸의 과외선생이 되자 나머지 구성원들도 다 그 집에 취업하고픈 욕망을 갖는다. 희대의 사기를 동원한 끝에 기택과 아내, 그리고 딸도 결국 박사장 집에서 일자리를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넷이서 돈을 번다면 얼마 안 있어 반지하를 벗어나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으니, 그건 바로 기택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박사장네 가족들은 기택네 가족에게서 불쾌한 냄새를 맡는다. 박사장은 그걸 ‘가끔 지하철을 타면 나는, 행주 삶는 듯한 냄새’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냄새가 난다고 말할 때, 사람은 위축된다. 기택은 냄새를 없애보려 노력하지만, 딸의 일갈은 그런 노력이 헛수고임을 말해준다. “그거, 반지하 냄새야.” 결국 분노한 기택은 사고를 치고, 그 대가로 박사장네 가족은 파멸을 맞는다. 여기에 대한 소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인간인데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는 쪽과, 당장 먹고사는 게 중요하니 참아야 한다는 쪽, 둘 다 틀린 의견은 아니다.


[서민의 어쩌면]그래, 나 친일파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전쟁이 한창이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우리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로 맞서고 있다. 논란이 되는 것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체결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다. 당시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를 받았는데, 일본에 강제로 징용당한 우리 국민들의 청구권이 여기에 포함됐는지에 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우리 측은 청구권이 살아있다고 판단하지만, 일본은 한국 정부가 돈을 받아놓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이 사안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작년 10월 대법원에서 결론을 낼 때 7명은 다수의견을 냈지만, 3명은 별개 의견을, 2명은 다수의견에 대해 반대의견을 낼 정도였다. 물론 이걸 빌미로 경제전쟁을 선언한 일본의 행위는 치졸하다. 게다가 일본은 식민지배 이외에도 숱하게 우리를 괴롭혔다. 국민들이 일본을 규탄하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안타까운 것은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그다지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정부가 볼 때는 이번 사태가 꼭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전쟁에 들어가면 정권의 지지율이 오르는 데다 경제가 나쁜 것에 대한 책임을 일본에 전가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본을 매개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한·일관계의 악화는 재앙 그 자체다. 일본음식점 주인은 텅 빈 가게를 보면서 눈물짓고, 여행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은 부품을 수입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른다. 누군가는 이 사태가 ‘하늘이 주신 전화위복의 호기’라며 일본 부품의 국산화를 주장하지만, 국산화라는 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한일청구권협정에 관해 다른 의견을 내거나, 정부가 일본과 협상하라고 목소리를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문빠’로 일컬어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세력이 그런 사람들에게 ‘토착왜구’ ‘너희 나라로 가라’ 같은 막말을 해대기 때문이다. 정부 대응에 대해 회의적인 멘트를 날렸다는 이유로 방송사 앵커가 하차하기도 했다. 이 나라의 민정수석이란 분도 합세한다. 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에 대해 한국 정부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친일파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정권을 비판하면 빨갱이로 몰리던 시절을 겨우 견뎌냈는데, 이젠 친일파가 될까 봐 눈치를 보게 생겼다.


현시점에서 정부가 입장을 바꾸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선빵’을 멋지게 맞받아쳐 놓고 인제 와서 굽히자니 영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책임 있는 정부라면 자존심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된다. <기생충>에서 기택이 한 선택은 한 가족만 파탄시켰지만, 정부의 선택은 수많은 이를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독도 문제처럼 우리 주권에 해당하는 사안이라면 끝까지 싸워야겠지만, 이번 사건은 대법원 판결을 둘러싼 해석의 문제니 얼마든지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787년 전,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무신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며 항쟁의 길을 택했다. 적당히 항복을 받고 전쟁을 끝내려던 몽골은 이 조치에 격분한다. “(몽골 장수) 살리타는 이참에 아예 고려를 완전히 제압하고자 강화도를 공격하는 대신 분풀이 삼아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기로 마음먹었다.”(<종횡무진 한국사 1권>, 463쪽)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사로잡힌 백성은 20만이 넘고,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467쪽) 결국 고려가 사신을 보내 항복하기까지 했으니, 고려가 그 항쟁으로 얻은 것은 없었다.


물론 지금의 한국은 당시 고려보다 낫고, 지금 일본은 당시 몽골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 경제전쟁이 일본보다 우리에게 더 큰 손해를 입힐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난, 정부가 자존심을 잠시 접어두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련다. 이러면 내게 어떤 말이 쏟아질지 잘 알고 있기에, 미리 얘기한다. 그래, 나 친일파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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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눈] 한국 경제 겨눈 아베의 칼

세계일보 2019.07.23. 23:20

   

아베 對韓 행태 트럼프와 겹쳐 /
지지층 결집·중도층 회유 속내 /
韓 선진국 도약 최대 지연 의도 /
은인자중, 실력 키워야만 할 때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대한(對韓) 수출규제 행보를 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겹쳐 보인다. 기존의 국제 규범이나 관행을 무시하는 ‘자국 우선주의’, 국내 유권자를 의식하는 포퓰리즘 행태가 그렇다. 이런 행태는 국내 선거를 앞두고 도드라지는데, 그 첫 번째 수순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줄기차게 중국을 때리고 있다. 미국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 것은 ‘세계화’ ‘국제 분업’의 불가피한 산물이었는데, 트럼프는 그 책임을 대미 무역흑자국에 돌리면서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다. 미국이 과연 자유무역을 선도해온 나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가 됐다.

일찍이 데이비드 리카도는 자유무역이 교역 상대국의 경제 발전 정도에 관계없이 두 나라 모두를 이롭게한다는 ‘비교우위론’을 주장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 간 무역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무역전쟁이라고 하지만 한 꺼풀 걷어내고 보면 경제를 수단으로 한 정치전쟁, 외교전쟁이다. 정치인들은 국내 경기가 위축되거나 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무역규제 공약을 내세우며 유권자를 회유하곤한다. 트럼프 정부가 시작한 미·중 무역전쟁도 양국 사이의 무역 불균형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맞수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세계 전략이 녹아있다.
조남규 산업부장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도 트럼프의 행보와 다르지 않다. 수출규제 이면에는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고 중도층을 회유하겠다는 속내가 엿보인다. 얼마 전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했으니 아베로선 밑지지 않은 장사를 한 셈이다. 선거 이후에도 규제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아베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한국의 선진국 도약을 최대한 지연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유무역에 올라 탄 덕분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일본이 국제분업 체제를 흔들어대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 경제가 갈림길에 서있는 비상한 시기다. 우리나라를 국내총생산(GDP) 12위(2018년) 국가로 밀어올린 성장 로켓의 1단 엔진은 추력(推力)이 떨어져가고 있다.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데 필요한 2단 엔진은 아직 점화되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의 2030년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 비전,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현대자동차의 수소전기차 프로젝트 등은 이를 위한 시도들이다. 아베 정부가 한국에 공급하지 않겠다는 핵심 소재(素材)는 바로 이런 프로젝트를 지연시키거나 무산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아베의 칼이 우리 산업의 아킬레스건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다.


불편한 진실은 단기간에 대체하기 힘든 일본의 소재 경쟁력이다. 일본의 경제평론가인 고무로 나오키가 한국 경제를 목줄(부품·소재 산업)에 묶여 물고기(완제품)를 잡아도 곧바로 주인(일본)에게 바치는 ‘가마우지 경제’라고 이름붙인 게 1988년이다. 고무로는 우리 경제를 두고 목이 끈으로 묶인 채 먹은 고기를 어부에게 고스란히 내줘야 하는 가마우지 신세라고 비꼬았지만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뒤늦게 근대화에 나선 우리는 수출 대기업 중심의 압축성장 경로를 밟아왔다. 그 결과 우리 기업은 한때 일본이 석권했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부문 등에서 전개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았다. 그 과정에서 소재·부품은 비교우위를 지닌 나라에 의존하는 국제분업의 틀이 짜였다. 이제 와서 우리는 왜 주요 소재·부품을 국산화하지 못했느냐고 추궁하는 것은 부질없다. 강대국의 패권 다툼과 각국의 국내 정치가 국제분업에 기반한 자유무역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도 핵심 소재를 국산화하고 수입선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옳은 얘기지만 일본의 소재·부품 경쟁력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게 아니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혼을 담아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일본의 ‘모노즈쿠리’(物作り) 정신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수많은 강소 회사를 만들어냈다. 중소기업 연구원이 노벨 화학상을 받고 100년 이상된 기업이 수만개 존재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반일(反日) 정서만으론 절대 일본을 넘어설 수 없다. 은인자중,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조남규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