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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19세기말 만민공동회 주도… 왕정 허물고, 민주공화정으로 나가다

바람아님 2023. 8. 16. 04:15

조선일보 2023. 8. 16. 03:02

① 최초의 자발적 민중집회… 지도자로서 두각 드러내

연재를 시작하며

조선의 근대화는 개항(開港)이라 불린 변혁으로 시작되었다. 본질적으로, 개항은 우세한 유럽 문명의 도래라는 도전(challenge)에 대한 조선의 대응(response)이었다. 중세 사회였던 조선이 현대 사회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대응이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근대화 과정을 이해하는 일에선, 중요한 고비들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행적을 살피는 것이 좋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거의 모든 고비들에서 활약한 인물을 가졌다.

이승만은 공식적 개항 전년인 1875년에 태어났고 1890년대 말엽부터 1960년까지 정치 지도자로 활약했다. 조선 역사의 변곡점들에서 그가 한 일들을 살피면, 우리는 우리 역사를 줄거리가 뚜렷한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


‘선구자이자 스승’ 서재필과의 만남
위대한 인물이 나오려면, 그가 가야 할 길을 열어주는 선구자가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사람이 길을 여는 데 매달려서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승만의 경우, 그런 선구자는 서재필이었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누구도 왕정복고를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 민주공화국을 지향했다. 조선 왕실에 대한 깊은 실망이 왕정복고를 막았다면, 만민공동회의 기억이 민주공화정을 향한 첫발을 선뜻 내딛도록 했을 것이다.

‘워싱턴 밀사’의 임무…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반세기 만에 결실 봐
1904년 11월에 그는 밀서를 품고 제물포에서 기선에 올랐다.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 협상을 주선하던 루스벨트에게 약소국 조선은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했다.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공산군과 휴전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하면서 거세게 반대했다. 결국 그는 휴전에 대한 동의의 대가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냈다. 1904년에 부여받은 호국의 임무를 반세기 만에 이룬 셈이다.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실제로 나온 이런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이승만의 길고 힘들었던 삶을 위대한 서사시로 만든다.


https://v.daum.net/v/20230816030212083
[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19세기말 만민공동회 주도… 왕정 허물고, 민주공화정으로 나가다

 

[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19세기말 만민공동회 주도… 왕정 허물고, 민주공화정으로 나가다

연재를 시작하며 조선의 근대화는 개항(開港)이라 불린 변혁으로 시작되었다. 본질적으로, 개항은 우세한 유럽 문명의 도래라는 도전(challenge)에 대한 조선의 대응(response)이었다. 중세 사회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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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재필과 군축회의 참석한 이승만 -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이승만(왼쪽) 한국 대표단장과 서재필 부단장. 이승만 46세, 서재필 57세 시절의 일이다.

 

민중 1만여명 모인 만민공동회 - 1898년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장면을 묘사한 그림 ‘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1978년 최대섭 작품).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