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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밀명 뒤 10년 걸렸다, ‘유도탄의 아버지’가 전하는 개발 비화

바람아님 2024. 2. 12. 07:21

조선일보 2024.02.12. 05:40 수정 2024.02.12. 06:25

[월간조선]
이경서 박사 인터뷰

“기적은 행동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남이 잘사는 비법을, 다만 지식으로 삼는다거나 감상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이냐.”(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1963)

“나라의 명운(命運)이 걸린 문제다. 즉각 유도탄(誘導彈) 개발에 착수하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긴급 밀명(密命)이 떨어졌다.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나온 직후의 일이다. 1969년 7월 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은 괌에서 백악관 수행기자단과 기자회견을 했다. 닉슨은 단호했다. 동맹국들의 ‘자주국방 능력 강화’를 역설하고, 미국의 부담 감축 방침을 천명했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미국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이 그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닉슨 독트린은 대한민국에 있어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직접적인 군사적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러한 회견 내용은 즉각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닉슨은 우방 및 동맹국들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는 지키겠지만, 핵(核) 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를 책임지라고 했다. 핵우산과 경제원조는 계속하겠지만, 군사적 개입은 줄이겠다는 선언이었다. 한반도에 관해서는 ‘한국 안보의 한국화(Koreanization of Korea Security)’라는 말을 들고 나왔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국산 무기라고는 소총(小銃)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나라에서, 무슨 수로 1차적 방위를 책임진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수년간의 불철주야(不撤晝夜) 분투를 통해 가능으로 바꿔낸 사람들이 있다. 이 중 한 명이 유도탄 개발의 총책임자 이경서(李景瑞·85) 박사다.

‘서울이 맞으면 평양을 때린다’

- 박정희 대통령이 유도탄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단호히 명령한 배경은 뭡니까.

“그 당시에 상호주의 원칙, 비례폭격 비례대응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북이 도발해서 소총 한 발 쏘면 우리도 소총 한 발만 쏜다는 원칙이죠. 예를 들어, 저쪽에서 포 한 발 쏘면 우리도 포 똑같은 것으로 한 발 쏜다는 1대 1 개념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소련제 프로그(Frog)라는 사정거리(射程距離) 70km인 로켓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로켓을 휴전선 인근에서 쏘면 서울에 떨어질 수 있었죠. 박 대통령은 대응 수단이 꼭 필요하다고 본 듯합니다.”

쓰레기까지 가지고 왔다는 소문은 청와대에까지 들어갔다. 대통령이 현장 점검을 나와 300갤런 믹서기 앞에서 딱 멈춰 섰다. ‘이거 돌려 봐!’ 믹서가 제대로 돌아가는 걸 본 대통령은 흡족한 얼굴을 하며 자리를 떴다.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4/02/12/GUXZ2REFJJG3VJNBNAQHCS47V4/
박정희 밀명 뒤 10년 걸렸다, ‘유도탄의 아버지’가 전하는 개발 비화

 

박정희 밀명 뒤 10년 걸렸다, ‘유도탄의 아버지’가 전하는 개발 비화

박정희 밀명 뒤 10년 걸렸다, 유도탄의 아버지가 전하는 개발 비화 월간조선 이경서 박사 인터뷰

www.chosun.com

 

국가와 혁명과 나
저자         박정희
출판         지구촌  |  1997.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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