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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 중세를 파괴한 '지적 이단아'

바람아님 2014. 12. 23. 18:32

(출처-조선일보 2001/02/23 이덕환·서강대 화학과 교수)

갈릴레이, 중세를 파괴한 '지적 이단아'

■갈릴레오의 딸 데이바 소벨 지음 홍현숙 옮김, 생각의 나무

‘갈릴레오의 딸’은 그 제목과는 달리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1642)의 일생을 재구성한 전기다. 

뉴욕타임즈 기자였던 소벨은 ‘과학자’가 아닌 ‘인간’ 갈릴레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칫 딱딱하기 쉬운 과학자의 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넣는데 성공했다.

갈릴레오는 철학적 논리가 아니라 자연의 관찰을 근거로 하는 과학의 새로운 접근법을 확립시킴으로써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게 된 위대한 과학자다. 물론 그는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인했고, 물체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주장으로 고전역학의 틀을 마련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역시 교회와의 갈등이었다. 

천체의 움직임을 분석한 ‘대화’(1632)가 종교재판에서 성경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이단으로 심히 의심”을 받아, 

그 후 200년 동안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10명의 재판관 중 7명이 서명했던 교회의 역사적 오류는 360년이 지난 

1992년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비극적인 상호 몰이해”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함으로써 마침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인간’ 갈릴레오의 모습이다. 

가족과 자식들로 인해 실망을 하고, 전쟁과 전염병으로 어수선한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은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 책은 1623년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갈릴레오를 위로하는 딸 첼레스테 수녀의 편지로 시작된다. 

평생 결혼한 적이 없었던 그였지만, 파도바대학의 수학 교수로 있을 때 만났던 마리아 감바와 12년에 걸친 은밀한 생활에서 

1남 2녀를 두었다. 두 딸은 수녀원에 보냈고, 병약한 둘째 딸과 방탕한 막내 아들 때문에 실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영민함과 근면함을 이어받은 첼레스테와는 평생을 서로 깊이 의지하며 살았다.

평생을 이름 모를 병에 시달렸던 갈릴레오는 첼레스테와 수 많은 편지를 교환했다. 

그러나 종교재판 직후 후환이 두려웠던 수녀원장이 모두 불태워버렸고, 지금은 124통의 편지만 전해진다. 

수녀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와 가족에 대한 안부가 대부분이었던 그녀의 편지는 말년에 이르면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애정과 격려로 채워지게 된다.

갈릴레오의 사회 생활은 더욱 인상적이다.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갈릴레오는 ‘출세’에 관심이 많았다. 

사교술이 뛰어났던 그는 박봉의 교수직을 벗어나 ‘궁정학자’로 발돋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대중 강연도 출세의 한 방편이었던 듯 싶다.

그는 결국 방학 중에 토스카나 대공의 아들을 가르치는 기회를 얻었고, 그 아들이 대공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면서 

1610년에 드디어 대공의 ‘수석 수학자 및 철학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자신의 책을 대공의 가문에 헌정하고, 

처음 발견한 목성의 네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대가로 얻은 명예였다.

한편 이미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그는 교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해석과 성경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적도 있었지만, 결코 이단으로 인정받을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훗날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된 바르베리니 추기경을 비롯한 여러 후원자들과 사귀게 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평소 친분이 있던 교황에게 ‘시금관’(1623)을 헌정하여 인정을 받으려는 그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독선적 해석에 집착했던 신부들의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더욱이 페스트와 전쟁에 지친 교황은 

그런 신부들의 모함에 넘어가서, 젊은 시절 그렇게 총애했던 갈릴레오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연금 상태에서 첼레스테의 죽음(1634)에 따른 고통으로 시력까지 상실했던 그는 

그의 마지막 저서 ‘두 개의 새로운 과학’(1938)을 교회의 눈을 피해 네덜란드에서 발간하고, 쓸쓸하게 78년에 걸친 삶을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제자였던 비비아니가 그의 시신을 딸과 함께 묻어주었고, 95년이 지나서야 그의 무덤에 비석이 

세워지게 되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다. 

17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교회의 가르침이 곧 진리였지만, 과학의 힘을 영원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깊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갈릴레오’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을까? 생명과학이 “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무차별적인 비판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교황이 “과학과 기술이 탁월하고도 근본적인 사고방식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10년도 안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