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허경구 칼럼:한국 외교, 무엇이 문제인가① 일본이 한국을 떼어내려 애쓰는 이유

바람아님 2015. 4. 6. 09:13

(출처-조선일보 2015.04.05)


외교란 한 국가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 의지 속엔 한 국가의 숙원이 들어있고, 원념(怨念)과 함분(含憤)이 쌓여있고, 
오랫동안 온양(醞釀)된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중국의 시진핑이 내건 ‘중국의 꿈’이 내포한 함축된 의미를 한번 반추해보면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또 일본의 아베가 내건 ‘정상국가로의 회귀’가 지향하는 바를 곱씹어보면 충분히 짐작이 갈 수 있는 말이다. 
두 국가가 지향하는 외교정책에는 그래서 과거의 수모와 억울함을 보상하려는 ‘원(怨)’과 ‘분(憤)’이 라이트모티브가 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외교정책에는 일정량의 독기마저 느껴지고 있다. 피해자인 중국은 그렇다치고 가해자인 일본마저 
그런 공격적 스탠스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도둑이 부지깽이를 드는 격이라고나 해야 할까?

시진핑의 중국은 과거 잃어버렸던 중국의 위대한 영광과 힘을 복귀하려고 모든 노력을 바로 그 한 방향에 쏟고 있다.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의 전통과 그 때 저지른 일을 최소화하고 지금의 일본과 그때의 일본 사이의 정체적 간극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독일은 현재의 독일과 과거 나치 독일 사이의 차이를 완전히 인정하고 있지만, 일본은 그렇게 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중국이 지향하는 바는 좋게 얘기하면 세계국가로의 복귀요, 나쁘게 얘기하면 패권국으로의 재등장이다. 
일본의 지향하는 바는 좋게 얘기하면 새로운 국가로의 탄생이요, 나쁘게 얘기하면 과거 일본이 지향하던 그 국가주의적 
정체성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설사 이것이 과거 군국주의로의 회귀와는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두 국가가 지향하는 바가 나쁘냐 좋으냐 하는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문제는 두 국가가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를 위해서 모든 외교적 수단을 집중해서 투입하고 있고, 그 한 가지 지향점을 향해서 
정치(精緻)한 외교 전략을 수립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은 그 국가적 의지와 지혜와 전략적 역량이 외교적 설계도에 따라 시간표처럼 착착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중국과 일본이 의도하는 외교적 구도에 따라 때로는 끌려가고 때로는 유인되고, 또 때로는 오도까지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은 무서우리만치 단단한 의지와 치밀하기 짝이 없는 잘 짜인 외교적 계산에 따라 
국가적 목표를 하나하나 추진해 나가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 국가목표를 대부분 달성하고 있고, 그리고 더 달성하게 되리라고 본다. 
중국과 일본은 어느 경우에도 상황에 휘둘리고 남의 간섭에 좌지우지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한국과는 정반대다. 
한국외교는 그 전략적 구도와 전모가 한 번도 유기적인 연동성을 가진 하나의 작동체계로 수립되어 본 적이 없었다. 
외교정책 간의 상호유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한국 외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고, 상황이 무르익기만을 바라고, 외교적 환경의 편의성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사실이다.
2014년 11월 10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뉴시스
2014년 11월 10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뉴시스
한국외교에 대해서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즉, 한국외교가 국가 간의 관계에 따른 현안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거나 일상적인 외교사안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식의 한국외교에 대한 비판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한국도 외교역량이 쌓일 만큼 쌓여있는 나라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한국외교의 전체적인 구도가 긴밀한 상호연결성과 전략적 함축성과 효용성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한국외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과 시각에 따른 것이지, 
현안 하나하나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려 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의 외교정책은 그 지향하는 바의 잘잘못을 떠나 정책 간 서로의 긴밀한 연동성을 가진 잘 짜인 시간표를 보는 
듯하다. 그 목표는 예측가능하고, 그 동원된 수단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동성을 유지하고 있고 추진하는 의지는 강력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한국은 지금까지 중국과 일본이 추진하는 외교정책방향에 표피적으로는 반대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외교는 특히 우리에게 이익이 될만한 전략적 현안 사항 간의 
아귀를 맞추는데 극히 미숙하다는 사실이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본은 한국을 한·미·일 동맹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본은 한국을 3국 동맹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떼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한국을 3국 동맹에서 떼어내게 되면 그 결과 일본에게 생기는 이득은 무엇인가?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된다. 
미국의 일본 의존성이 심화될수록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는 그 힘을 얻게 된다. 쉽게 얘기하면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군사·외교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혼자의 힘으로는 힘겹고, 일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있다는 것을 
일본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의 이 필요성을 최대한으로 역이용해서 미국에게 도움을 주는 대신 그 대가를 
바라고 있다. 그 대가는 이런 것이다. 일본이 스스로 과거 역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사죄하고 속죄하는 방식으로써는 
일본이 새로운 ‘보통국가’로 부상하는데 필요한 국민적 합의와 역량을 집결화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국가로의 부상에는 새로운 국민적 힘의 결집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일본 우익의 역동적인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국민적 힘의 결집, 여기에 대한 우익의 역동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바로 과거 일본 정치의 
정체성과의 일체성을 어느 정도는 회복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과거 정체성과의 일체성을 인정받는 데는 
미국의 이에 대한 수용과 인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미국의 이해야말로 일본이 미국에게 요구하는 
대가인 것이다. 이 요구가 충족되는 만큼 중국에 대한 견제력을 모으는데 일본은 협조하겠다는 조건 아닌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다.

과거 전쟁을 수행하던 일본의 국가정체성과 현재 국가 정체성간의 간극을 일본은 더 이상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미국이 이 요구를 기꺼이 수용해달라는 것이다. 그때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 간의 연속성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때의 전승국인 미국의 묵인이 더 없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서 일본은 교과서에서 일본의 전쟁과오도 
최소화하고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성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높이겠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다시 국제사회에 
재등장하는 명분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그 재등장을 위해 필요한 정당성은 과거 전쟁 잘못에 대한 모든 기록과 
기억을 없앰으로써 가능해지고 미국의 암묵적 승인으로써 그 합법성을 얻게 되리라는 속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본의 
재등장은 곧바로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과의 정면대결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일본의 계산에 끼어들어 
작심하고 훼살을 놓는 것이 한국이라는 것이 일본의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의 이런 작전 때문에 일본의 과거에 대해 전략적 
묵인(strategic connivance)을 하고 싶어하는 미국에게도 한국은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 역시 일본의 생각이다. 
이런 일본의 생각에는 미국도 동의하고 있는 듯 하다. 왜냐하면 한국이 이런 외교적 훼살 작전을 집요하게 펴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구축해온 한미일 삼각 동맹에 ‘마비’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미 국무성의 의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②편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