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문유석 부장판사의 세상일기(27) 힘 없으면 명분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

바람아님 2015. 5. 11. 09:14

(출처-조선일보 2015.05.01문유석 부장판사)


좋은 기회가 있어 병자호란 연구의 권위자인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감명을 받아 한명기 교수의 역작 '역사평설 병자호란'도 읽었다. 
문외한이지만 감히 배운 내용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최명길에 관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명길은 척화파 김상헌과 대립했던 주화파로, 자신이 쓴 항복문서를 김상헌이 찢자 그 조각을 주우며 
"나라에는 문서를 찢는 신하도 필요하고 나처럼 이를 붙이는 신하도 필요하다."고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끝까지 굴욕을 참고 항복을 진언하던 모습만이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

최명길은 호란 발발 전, 국력의 차이를 현실적으로 직시하고 청과 화친하여 평화를 도모할 것을 계속 주장하나, 
명나라의 신하로서의 절개를 주장하며 오랑캐와 일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는 척화파들에게 비겁자로 공격당한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결국 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척화신들은 인조에게 강화도로 조정을 옮겨 농성할 것을 
주장한다. 이때 비겁자로 비난받던 최명길은 인조에게 끝끝내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오히려 전군을 이끌고 압록강 국경으로 
나아가 일전을 벌일 것을 진언한다.

패배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백성이 청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참화를 입는 것을 그나마 최소화하려면 패하더라도 
국경에서 패하고 강화를 맺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인조와 강경 척화신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하다가 강화도로 도망갈 길마저 봉쇄되고 만다. 
이미 적의 선봉대가 지금의 녹번동 일대에 이르렀다.

이때 최명길은 자신이 청군 선봉대를 만나 담판을 벌이며 시간을 벌테니 그 사이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시라고 진언하고 
혼자 말을 몰고 적의 선봉장 마부대를 만나 청이 쳐들어온 명분이 무어냐고 따지며 담판을 벌인다. 
그 사이에 인조와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겨우 피신한다.

호란 전에는 청을 정벌하자며 기세등등하던 도원수 김자점 등 강경파들은 남한산성으로 근왕병을 보내지도 않은 채 
사실상 숨고, 동상과 굶주림에 죽어가던 남한산성의 나날은 최명길이 온갖 모욕을 당하며 작성한 항복문서로 마무리된다.

군사력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하던 청 태종이 요구한 항복조건은 조선 백성을 청군이 끌고 갈 것인데, 
백성들이 압록강을 넘기 전에 도주하면 쫓지 않겠으나, 국경을 넘은 후 도주하여 조선으로 돌아오면 조선 임금이 이들을 
잡아 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어기면 왕위에서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김한민 감독의 영화 '최종병기 활'이 바로 이 시기를 그린 영화다. 
극중 박해일이 연기한 인물은 여동생이 압록강을 넘기 전에 구해내야만 했던 것이다.

도주하려던 조선 노예들은 청군에 의하여 발뒷꿈치가 잘리는 고통을 당한다.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래도 소수는 천신만고 끝에 만주에서 도망쳐 압록강까지 도달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것은 조선 관군들의 화살과 어서 돌아가라는 명령뿐이었다.

특히 여성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심양까지 끌려가 청나라 사람들의 첩으로 전락했다가 친정 부모가 몸값을 내는 등 여러 노력 끝에 고향으로 되돌아오지만 
'환향녀(還鄕女)'라는 멸시에 시달린다.

잘난 사대부들은 빗발치듯 인조에게 상소를 올린다. 정절을 더럽힌 더러운 환향녀와의 이혼을 허가해 달라는.

최명길은 이에 반대한다. 
조정과 정부 대신들의 잘못으로 청나라에 끌려가서 능욕을 당한 것이니 잘못은 조정의 대신들에게 있는 것이고, 
환향녀라는 비난은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난만 받는다. 
심지어 인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조차 최명길을 통렬히 비난했다. 
마땅히 죽음으로 절개를 지켜야 함에도 실절한 환향녀를 옹호한 것은 오랑캐와 다름 없는 짓이라고.

나무에 목을 매고 강에 몸을 던지는 여인들의 비극이 계속되자 최명길은 다시 진언한다. 
팔도에 절개를 회복하는 강, 즉 '회절강(回節江)'을 지정하여 여기서 몸을 씻은 여인들은 절개가 회복된 것으로 국법으로 
정하자는 것이다. 금강, 소양강, 대동강, 예성강. 그리고 한양과 경기 지역은 홍제천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당시 사회는 이 여인들을 감싸안지 않고 냉대했다. 
그 자식들조차 오랑캐의 자식, 즉 '호로자(胡虜子)‘라고 부르며 차별했다.

비극적인 역사다.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참화를 입어야 했던 약자의 현실이다. 
백성을 실제로 지킨 것은 소리만 요란한 비분강개와 명분론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용기였다. 
역사는 반복되기에 늘 공부해야 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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