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만물상] 중국식 의전(儀典)

바람아님 2015. 9. 4. 09:43

(출처-조선일보 2015.09.04 이명진 논설위원)

1970년대 미·중 수교의 주역이었던 키신저가 회고록에서 중국의 외교 의전(儀典)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은 서로 의논해 정하지 않고 즉흥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황제가 알현(謁見)을 허락하던 옛 습관의 반영이었다"고 했다. 
저우언라이의 안내로 마오쩌둥 관저에 갈 때 미국 경호 요원의 동행은 일절 허락하지 않았고 언론에도 나중에야 알렸다. 
키신저는 "엄밀히 말하면 중국이 우리를 '초대했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고 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도 별 차이 없었다. 
중국 지도부가 100여국 정상이나 왕족에게 인민대회당에서 점심을 대접했다. 
정상들은 후진타오 주석 부부와 악수하고 기념사진 찍으려고 수십m 줄을 서야 했다. 
부시도 푸틴도 30분 가까이 기다렸다. 
개막식 때는 찜통 같은 메인스타디움 관람석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웃옷 벗고 연신 부채질해대는 정상들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됐다. 책상과 푹신한 의자가 있는 귀빈석에 자리 잡은 중국 지도부는 표정이 여유로웠다.

[만물상] 중국식 의전(儀典)
▶중국만큼 손님 접대가 극진한 나라도 드물다. 
손님과 식사할 땐 반드시 문 맞은편 상석에 앉히고 음식은 남길 만큼 풍족하게 시킨다. 술은 취할 때까지 권한다. 
그런데 유독 외교 행사에선 '실례'가 가끔 벌어진다. 
작년 APEC 때는 행사 잘 치러놓고 관영 매체들이 "만방래조(萬邦來朝)"라고 보도해 산통을 깼다. 
당나라 때 주변국 사신들이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온 것 같았다는 뜻이다. 

▶뿌리 깊은 중화(中華)주의 탓이라는 말도 있다. 
옛날 외국 사절단이 황제를 만나려면 특별한 의식을 치러야 했다. 
청나라 땐 무릎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뒤 세 차례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건륭제를 만난 영국 외교관은 못 하겠다 버티다 결국 머리를 숙였다. 
20여년 뒤 다른 외교관은 끝까지 거부하다 결국 황제를 못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진핑 주석이 중국 전승절 열병식 행사 참석차 온 30여국 정상을 자금성 앞 돤먼(端門) 광장에서 맞았다. 
정상들은 차례로 붉은 카펫 위로 꽤 먼 거리를 걸어가 시 주석 부부와 악수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중에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있었다. 
그 길이 옛날 사신들이 황제를 만나러 가던 바로 그 길이어서 TV 생중계를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상들이 만나는 다자(多者) 외교 행사에선 주인이 선 채로 손님 맞고 기념사진을 찍는 게 관례다. 
과거의 잣대로 오늘의 의전을 평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