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35] 남길 게 그리 없어 지린내를 남기셨는가

바람아님 2013. 8. 21. 09:55

(출처-조선일보 2012.12.02 손철주 미술평론가)



	'소나무에 기대어' - 오명현 그림, 종이에 담채, 27×20㎝, 18세기, 선문대 박물관.
'소나무에 기대어' - 오명현 그림, 종이에 담채, 
27×20㎝, 18세기, 선문대 박물관.

아래로 휜 소나무 외가지가 멋들어지다. 의지가지없는 덩굴은 축 늘어졌다. 사내 하나가 지금 수상쩍은 거동을 한다. 휘청거리는 몸을 소나무에 기댔는데 한쪽 발이 삐끗, 자칫 모로 쓰러질 판이다. 보아하니 눈꺼풀은 천근만근, 돌아가는 형편을 알 리 없다. 꼴사나운 건 갓이다. 걷는 길에 어느 집 담벼락을 들이박았는지 챙이 뒤틀리고 모자가 짜부라졌다. 몸을 다 구긴 처지에 얼굴인들 하마 성할까. 망건 사이로 머리카락이 풀풀 날리고 살쩍과 나룻은 아주 수세미다. 곤드레 취한 사내, 민망한 행색 그대로 딱 걸렸다.

무엇보다 그의 신분이 궁금하다. 대낮에 저토록 마셔댔으니 말이다. 차려입은 옷가지로 보면 그는 무지렁이가 아니다. 소매가 넓고 끝자락이 곧으며 옆트임을 한 겉옷은 중치막이다. 허리에 두른 끈목과 무늬가 들어간 갓신까지, 태깔이 변변한 걸로 헤아리건대 그는 사족(士族)이다. 오른손에 쥔 막대는 지팡이치고 가늘다. 위쪽이 담배통 모양이라 장죽이 맞겠다. 담뱃대가 길어야 아랫것을 시켜서 연초쟁이기가 편하다. 술에 절어서 그렇지 그는 어디 가서든 거드름 피울 만한 지체다.

사내가 수상쩍다고 했다. 왼손의 위치가 그렇단 얘기다. 그는 느슨해진 매듭을 잡았다. 고의를 여미는 동작인데, 그게 수월치 않다. 이쯤 되면 알 만하다. 그는 가득 찬 방광을 막 비웠다. 딴에는 솔잎 가려진 데를 조준한 모양이다. 어찌나 시원한지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림을 그린 이는 18세기 어름 평양 출신의 화가 오명현(吳命顯)이다. 이력이 덜 알려진 그는 전해지는 작품도 여남은 점 정도다. 얼굴 표정이 이처럼 생생한 풍속화도 드물다. 화가는 남들 모르는 곳에서 쌍되게 노는 양반을 풍자했다.

외밭에서 들메끈 매지 말고, 배나무 아래서 갓을 바루지 말라 했다. 벼슬이 오를수록 신독(愼獨)을 다짐해야 한다. 떠나고 나면 모를 거라고? 지린내가 어디 가겠는가.


(큰 이미지)


(오명환의 또 다른 풍속화 2점)

주인공은 지게에 옹기를 지고 가는 더벅머리 총각으로, 벙거지 밑으로 비어져 나온 흐트러진 머리와 털이 숭숭 나 있는 

정강이가 재미있게 묘사되었다. 눈동자에는 생기가 넘치고 얼굴은 즐거운 표정이다. 비단에 수묵과 깔끔한 채색으로 

묘사한 언덕과 풀숲을 배경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구도는 윤두서(尹斗緖)와 조영석(趙榮祏) 등 사대부 화가들이 

그려낸 풍속 인물의 유형과 유사하다(출처-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