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목개병(草木皆兵). 중국 언론이 작년 7월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한반도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의 보복을 지적하는 한국 언론의 보도를 인용할 때 간혹 쓰는 말이다. 흔들리는 풀과 나무까지도 적병으로 오인한다는 의미다. 최근엔 신화통신 자매지 참고소식이 수입 한국산 화장품 통관불허를 다룬 한국 기사를 전하면서 초목개병이라고 비꼬았다.
정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 보고 놀란 것일까. 문제의 기사는 이달 3일 중국 국가질량감독검험검역총국(질검총국)이 작년 11월의 수입통관 심사 결과를 웹사이트에 올린 내용을 근거로했다. 통관이 불허된 화장품 28건 중 19건이 한국산이란게 드러나면서 사드보복과 연계하는 기사가 봇물을 이뤘다.
질검총국 사이트에 적시된대로 19건중 13건이 서류미비로 퇴짜를 맞은 이아소라는 한 회사의 제품인 사실과 질검총국이 공개한 과거 통계를 보면 최근 한국산 식품과 화장품에 대한 통관 불허를 사드보복으로 연계짓는 관측은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대세는 ‘사드보복’이었다.
일부 언론에선 “11월에 문제가 된 것을 이미 해결했는데 지금와서 공개한 의도가 뭔지 의심스럽다”는 해당 화장품 관계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질검총국 사이트에서 매달 수입통관 불합격 내용을 한달 정도 지난 다음 발표하는 것을 안다면 이런 의혹 제기는 힘들다.
흔들리는 풀잎까지 적병으로 오인하는 이유는 뭘까. 1600여년 전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동진(東晉)을 치기 위해 이끌고 간 90만 대군이 명장 사현(謝玄)의 8만 군사에 패했을 때 풀과 나무를 보고 바람과 학 울음소리만 들어도 적이 추격하는 줄 알고 황망히 도주해서 나온 말이 ‘풍성학려 초목개병(風聲鶴唳草木皆兵)’이다.
리더십 부재와 과도한 두려움이 패전의 주범이다. 부견은 작전상 후퇴를 명령했지만 통일되지 않는 지휘체계하에서 전방(前方)에서 패한 것으로 오인한 병사들이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게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초목개병을 두고 언론 탓만 할일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으로 생긴 리더십 공백에다 잇따라 방중해 사드문제를 협의하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행보 역시 한국 경제가 곧 끝장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증폭시킨다는 지적에 자유롭지 못하다.
초목개병은 진검승부를 하기도 전에 선의의 피해자를 만든다. 상하이의 한 한국 화장품 업체 관계자는 “모든 문제를 사드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 탓에 정상적인 수입 거래선도 걱정하기 시작했다”며 답답해했다.
사드 탓만 하다보면 큰 변화의 흐름에 제 때 대응하지 못할 수 있다.중국의 화장품산업은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다. 화장품 수요는 급증했지만 업체 난립으로 국민건강을 위협할만큼 품질수준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따라 작년에 모든 중국내 화장품업체로 하여금 생산허가증을 경신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업체 3분의 1이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12월엔 화장품 안전기술규범을 만들어 1년 유예기간을 준 뒤 작년 12월 시행에 들어갔다. 수입산은 물론 중국산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나라 화장품에서는 허용되는 방부제 이소부틸파라벤이 새 금지물질로 지정됐다. 유럽에서도 금지물질이다. 대비하지 못한 우리 업체들의 무더기 통관 불허가 예상된다. 작년 7월 결정된 사드배치와는 무관한 흐름들이다.
물론 눈과 귀를 닫으란 건 아니다. 중국의 사드보복은 있다. 최근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성악가 조수미의 중국내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잇따라 취소됐다. 이달초 민주당의원단을 면담한 쿵쉬안여우(孔鉉佑)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는 한류 제한을 두고 “민심에 의한 제재”라는 표현을 쓰면서 인정했다. 베이징 외교소식통도 한류 제한과 함께 전세기 운항 불허, 한국 배터리 탑재 차량 보조금 배제, 한국행 관광객 축소 지침 등을 사드 보복 의심조치로 꼽았다. 중국이 아직 사드보복을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많다.
초목개병은 안되지만 매의 눈을 갖고 치밀하고 공격적으로 대응해야할 이유다. 조미 김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월간 기준 한국산 식품과 화장품 수입통관 불허건수가 최고치를 기록한 8월 61건 가운데 절반 가량(28건)을 김 한 품목이 차지했다. 조미 김은 비살균 식품이어서 세균 수를 제어하기 어려운데도 중국은 균락수를 제한하는 비관세 장벽을 만들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사드배치 이후 한중관계 긴장은 세계의 이슈가 됐다. 제3국의 중국 주재 대사관 관계자가 얼마 전 기자를 찾아왔다. 사드문제 이후 한중 관계가 궁금하다며 다른 한국특파원도 찾아갔다고 들려줬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은 물론 존 매케인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도 세계화를 외치는 중국이 한국에 사드보복을 가하는 이중행태를 비난했다.
우리의 사드 행보는 향후 글로벌 외교에서 한국의 입지를 좌우할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380년전 병자호란 때 청의 대군을 앞에두고 밖에서 싸우기 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었다고 한탄했다. 주전파(主戰派)는 실천 불가능한 정의를 외치고, 주화파(主和派)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고 갈파한다.
분열은 초목개병을 키워 또 다른 굴욕으로 이어질 뿐이다. 자신의 이익보다 큰 틀에서 긴 시야로 국익만을 보며 합의를 끌어내는 노력을 해야한다. 90만 대군도 8만에 패하도록 한 초목개병은 우리 내공 조차 십분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될 뿐이다.
베이징=오광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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