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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그 사람들]곽재우, 과거에 떨어지고 나라를 구한 '백수'장군

바람아님 2017. 3. 5. 22:42
아시아경제 2017.03.05 08:00
의령 곽재우 장군 동상(사진=한국관광공사)


임진왜란의 수많은 의병장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흔히 '홍의장군'으로 알려져있는 곽재우다. 그가 이끌던 의병부대는 그 숫자가 한때 6000명에 달해 단독 작전에 뛰어들 정도로 전력을 보유했고 전략과 사기, 기동 등이 정규군을 능가했기에 수많은 전적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곽재우가 의병장으로서 이런 뛰어난 작전을 펼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서 불합격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34세때인 1585년, 소과에 응시해 2등을 하면서 진사 자리에 오를 기회가 주어졌으나 운이 없게도 그해 시험은 답안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응시자 전원을 다시 불합격시키면서 울분의 백수로 돌아왔다.


물론 백수라고 해도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망있는 금수저 집안이었다. 본가인 현풍 곽씨, 외가인 진주강씨는 모두 경상남도 일대 대세력을 구축한 가문으로 특히 큰 부를 자랑했다. 그랬기에 어려서부터 학문과 함께 무예에도 힘쓸 수 있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말타기나 활쏘기, 검술 등 무예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사대부의 교양이었고 이러한 집안 상황은 훗날 의병 모집에 큰 힘이 됐다.

한편 소과시험에 계속 떨어지고 향교에 학생으로 등록도 안된 곽재우에겐 지금으로치면 군대 영장이 계속 날아왔고 군역을 책임지면서 상당기간동안 군 사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이런 군 생활 역시 훗날 의병장으로서 활약하는데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58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집안 자산을 관리했으며 과거의 뜻은 접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가산을 전부 털고 주변 친척들과 인맥들을 동원해 50여명의 병력을 만들고 왜군 후방의 수송부대를 공격하며 전공을 쌓기 시작, 금새 병력이 수천으로 불어났으며 홍의장군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하지만 의병장 출신이었던 이몽학의 난 때 수많은 의병장들이 의병활동을 중단하자 역시 역모로 몰릴 것을 우려해 의병활동을 중단했었고 이후 정유재란이 터지자 다시금 활약했다.


전후에는 경상좌병사로 임명돼 영남지역 군무를 총괄하게 됐으나 부임 4개월만에 시국의 문제점에 대한 상소를 올린 후 사표를 던지며 낙향했다. 전후 피해복구보다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재개된 붕당간의 정쟁에 질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분개한 선조는 그를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보냈으며 2년이 지난 1602년에서야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광해군 즉위 이후에도 마지막 벼슬살이는 순탄치 않았다. 경상우병사, 삼도수군통제사, 함경감사, 전라병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무관 고위직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당시 집권한 북인과 척을 지면서 낙향과 복직을 반복했다. 이후 1613년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으며 161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많던 재산은 의병활동과 빈민구제에 써버려 죽을때는 단벌 옷에 거문고, 낚싯배 한 척이 전부였다고 한다.


디지털뉴스본부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